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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큐시트] 상 앞에 일희일비하지만...인정과 격려가 수상의 본질

▲ ⓒ픽사베이

[PD저널=박재철 CBS PD] 지자(智者)는 긴 이야기를 짧게 하고, 우자(愚者)는 짧은 이야기를 길게 한다고 하던데 수상 소감에서 이 격언은 진가를 발휘한다. 수상은 대체로 누구에게나 기쁜 일이고, 가끔은 누군가를 향한 진한 고마움을 전하는 일이다.

하지만 주체 못할 기쁨을 남발하고 여우 꼬리 같은 감사 리스트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수상 소감은 어느새 수상 ‘유감’을 지나 수상 ‘반감’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와 관련해서 명예의 전당에 오를 만한 사례를 꼽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일성을 떠올리겠다.

“영화는 상과 관계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젊은 나에게는 그 상이 필요했습니다. 그건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격려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상은 영화가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상의 본질과 상의 의미가 모두 담겨 있다. 그의 말마따나 상과 작품은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상을 받았다고 별 볼일 없는 작품이 갑자기 뛰어나지고 반대로 뛰어난 작품이 수상을 못해서 별 볼일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상은 따지고 보면, 선정자들의 다수결이고 그날 어떤 선정자들이 모여 어떤 방식으로 논의했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상당한 우연의 소산인 셈이다. 여러 제도적 보완장치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앞서는 후보자나 시대를 꿰뚫는 작품이 수상 리스트에조차 오르지 못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무엇보다 작품의 성과가 수상의 여부로 가치 매겨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타인의 평가가 나의 고유한 작업에 개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때론 수상 거부로 나타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상에 일희일비할 일은 아니다. 어찌 보면 여기까지는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다음부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상의 참된 의미를 우리는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진지하게 자문해 봄직하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빛나는 점은 그 부분을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격려’에서 발견했다는 것이다. 영화를 포함한 대부분의 예술에서 혹은 우리가 제작하는 방송에 이르기까지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는 자기만족을 넘어서야 하는 순간이 있다.

혼자 즐기고 혼자 좋아하면 평가는 무의미할 수도 있지만, 이걸 외부에 내놓게 될 때 내 것은 온전한 내 것이 아니다. 그런 경우에 제작은 소통과 공감을 수반한다. 작품을 통한 나의 말 걸기가 수용자에게 유효한지, 최선인 건지, 늘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에 놓이게 된다. 그건 때론 고독한 일이고 때론 불안한 일이다.

상은 당신이 누군가와의 소통과 공감을 위해 들인 노력이 나쁘지 않았음을 인정해주는 일일 수 있다. 더불어 다음 작품을 다시 해보라고 등을 두드려주는 일이기도 하다. 구로자와 아키라는 그 부분을 적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그러니까 상은 영화가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같은 탁월한 수상 소감을 몰래 훔쳐서 어떻게 써볼까, 입 속의 혀를 둘리듯 마음속에서 이런 저런 궁리하고 있지만, 수상의 기회가 좀처럼 없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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