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간 얼굴의 연쇄살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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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필독도서 60]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액스'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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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오학준 SBS PD] 연쇄살인범의 얼굴은 궁금하지 않다. 여러 사람을 죽이고, 그 주변 사람들의 삶을 죽음보다 못한 상태로 몰아넣은 사람의 얼굴이 특이할 리 없으니까.

그에게 곧 ‘사이코패스’ 검사를 시행할 것이란 속보 자막이 뜬다. 그에게 사이코패스라는 도장을 찍고 예외 처리하면 다 끝날까? 평범한 얼굴에 찍힌 도장은 금세 희미해질 것이다. 문제의 근원을 드러내기보다 격리만 반복한다면 또 다시 말간 얼굴의 범죄자는 도시를 헤집고 다닐 것이다.

얼마 전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액스>를 읽었다. 설정이 충격적이다. 제지 회사에서 오래 일하던 주인공 버크 데보레는 경기 변동으로 인한 대량 실업의 여파로 직장을 잃는다. 금방 일자리를 다시 얻을 수 있을 거라 낙관했지만 번번히 합격에 실패하고 생계는 점차 어려워진다.

어떻게 하면 재취업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그는 결론을 내린다. '나보다 잘난 애들 제치면 되지.' 그래서 가짜 회사를 차린 후 받은 수많은 이력서들 중에 자기보다 조금 더 나아 보이거나 경쟁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을 추려 그들의 '모가지'(추천사를 쓴 박찬욱의 표현을 빌면)를 하나씩 따기 시작한다.

처음엔 철저한 준비 후에도 막상 사람을 죽이고서 벌벌 떨고, 마음을 안정시키려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며 초조함을 드러내는 미숙한 살인마였다. 죽이려고 했던 사람과 우연히 원하지 않는 대화를 나누고, 그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처해 있지만 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본 후에는 대성 통곡을 한다. (물론 살인 이후에) 하지만 한잠 길게 자고 나더니 이래서야 효율적인 프로젝트 수행(그는 살인을 ‘프로젝트’라고 부른다)에 방해가 되므로 연민의 감정이나 인간적 교류를 철저히 차단하겠다 마음먹는다. 그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만큼, 나의 등골은 오싹해진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가 쓴 '액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가 쓴 '액스'

자신이 왜 남의 '모가지'를 쳐야 하는지 정당화하는 과정은 궤변이다. 1인칭 화자의 시야 한계를 이용해서 독자들이 손쉽게 감정 이입을 하지 못하게 만들기에, 이 궤변은 좀더 손쉽게 간파 가능하다. 하지만 그가 의외로 똑바로 사리 판단하는 게 가능하단 사실은 여러 장면에서 드러난다. 자신을 이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동료 노동자가 아니라 전문경영인들과 그들을 자리에 앉힌 대주주란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루거를 든 것은 데보레지만, 모가지를 따는 도끼를 크게 휘두른 건 그들이다. 그가 루거를 들고 피해자를 찾아가는 자리마다 도끼로 잘려 나간 사람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멍청해서가 아니라, 너무 똑똑해서 그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너무 빠르게 체념했다. 세계는 해결 불가능한 영역, 자연과도 같다. 그러니 그것에 도전하기보다 해결 가능한 범위에서 문제를 기획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반복해 효능감을 얻고자 한다. ‘대량 해고를 막을 수 없다면 경쟁자를 줄이자, 아내의 바람을 막을 수 없다면 바람난 상대방을 지워버리자. 심지어 그런 일을 하는데 별다른 리스크도 없지 않은가?’ 데보레에겐 살인도 좋은 문제 해결 방법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내를 지키고 가정을 지킬 수 있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루거를 들고 움직일 것이다.

데보라 버크는 한병철이 이야기하던 '프로젝트'적 주체의 모습을 닮았다. 그가 풀려는 문제가 정확한지의 여부보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중요하다.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과정이 무한히 반복되는 게 중요하지, 실제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 중요한 건 아니다.

그렇기에 그는 치밀하게 프로젝트를 설계하고 철저하게 실행한다. 먼 곳까지 사전 답사를 가고, 다양한 알리바이도 마련한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대화를 능숙하게 하고, 거짓말도 잘 한다. 가족은 끝내 범행을 모르고, 엉뚱한 사람들이 사건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파탄에 이른다.

그의 살인을 멈출 기회는 있었다. 하지만 그가 저지른 살인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빠르게 식는 모습을 경험한 후 그는 살인의 부담을 덜었다. 그는 자신이 추적 당할까봐 조마조마했지만 사람들에게 이 사건들은 잦은 살인 사건 보도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타인에게 그렇게 큰 관심거리가 아니라는 사실에 그는 안도한다.

그는 더 이상 살인에 미숙하지 않다. 사람들 사이에 악의가 없는 경우는 드물기에, 누구든 범인이 될 수 있었고 경찰은 엉뚱한 사람들을 지목해 사건을 종결 시키는 데 몰두했다. 누구도 자신의 목을 옥죄어오지 않으니, 누군가 대신 목을 옭아매고 죽는다. 똑똑한 데보레에게 메시지는 명확하다. 당신의 프로젝트는 끝내 성공하리라.

택시기사와 동거인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신원이 공개된 이기영의 행적을 추적하는보도가 줄을 잇고 있다.
택시기사와 동거인을 살해한 혐의로 신상이 공개된 이기영의 행적을 추적하는보도가 줄을 잇고 있다. 2일 MBC 뉴스데스크 리포트 화면 갈무리. 

그는 특이한가? 정상은 아니다. 마음 속에 오늘 상사의 '모가지'를 따고 싶다는 생각을 하더라도 그것을 실제로 구현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도 계획까지 짜서 실행하는 경우는 없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고 그를 소설 속 예외적 인물로 치부할 수 있을까?

그가 기괴한 선택을 내리는 과정에서 노동자 사이의 연대가 상상적 차원에서부터 부서져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보여달라는 끊임없는 자기계발의 명령도 그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강박적으로 찾게끔 만들었다. 말간 얼굴의 살인마를 너무 많이 만났고, 데보레 역시 그런 얼굴이었다. 다른 세계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이 소설의 출간연도는 1997년이다. 출간 이후 2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는 미쳐가는 상태에 있다.

그래서 징벌을 받는가? 안타깝지만 원하는 대로는 아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행운'을 빈다. 그가 자기보다 나은 동료 노동자들을 물색하기 위해 가짜 회사 광고를 돌리러 우체국을 방문했을 때, 우체국 직원은 그에게 행운을 빈다고 말한다. 엉뚱한 사람을 용의자로 지목하고 나서 데보레가 면접을 간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경찰은 그에게 행운을 빈다고 말한다. 모두가 살인마에게 행운을 빌어주는 아이러니한 세계에서 '업보'의 원환이 명확할 리 없다.

잡히기 전까지 그가 끝내 살인을 멈출 수 없을 것을 안다. 법도 업보도 우리를 이 찜찜함의 지옥에서 구원해주지는 못할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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