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아닌 ‘간첩단 보도’, 때마침 필요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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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대공수사권 경찰 이관 앞두고 간첩단 사건 대서특필
공안정국 조성하고 민주노총·시민단체 ‘좌표찍기’ 의도

국가정보원이 2022년 12월19일에 제주시 소재 진보당 제주도당 위원장의 자택을 압수수색했다.©뉴시스
국가정보원이 2022년 12월19일에 제주시 소재 진보당 제주도당 위원장의 자택을 압수수색했다.©뉴시스

[PD저널=이봉우 미디어인권연구소 뭉클 객원연구원] 때아닌 ‘간첩단’ 보도가 주요 일간지 1면을 장식했다. ‘때아닌’이라는 수식어보다 ‘때마침’이 더 어울릴 수도 있겠다.

언론은 ‘당국이 혐의를 따져보고 있다’면서도(<“제주 간첩단, 북한 지령 받고 투쟁” 창원·전주 지하조직도 압수수색>문화일보 1월 9일자 보도) ‘진보정당과 노조에 침투한 2021년 청주간첩단 사건과 유사하다’, ‘30년만의 최대 규모 간첩 사건’ 등의 묘사를 썼다.

내년부터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이 경찰로 이관되는 걸 막아야한다는 속내를 숨기지도 않았다. 민주노총 등 정부 비판 세력을 강하게 압박하며 지지층 결집을 노리는 윤석열 대통령, 전 정부 개혁을 뒤집고 전임 원장까지 직접 고발하며 과거의 권력을 되찾으려는 국정원 행보에 맞춰 ‘때마침’ 국정원발 ‘간첩단’ 보도가 나왔다고 해도 그리 무리한 해석은 아니다. 

그런 해석은 ‘간첩단 사건의 사실 여부’가 아니라 그걸 섣부르게 대서특필한 보도에 기인한다. 보도의 출처와 목적이 너무 뚜렷하고 단일하다. ‘간첩단’ 보도의 서막을 알린 <조선일보>의 <[단독] “민노총·시민단체 앞세워 투쟁하라” 北지령 받은 제주 간첩단 적발>은 “국가정보원과 경찰의 작년 말 압수수색 영장”을 출처로 밝혔다.

어떻게 입수했는지 밝히지는 못한 이 압수수색 영장에 따르면 진보정당 간부가 2017년 캄보디아에서 북한 대남 공작원을 만나 ‘ㅎㄱㅎ’라는 지하조직을 설립해 반보수, 반윤석열, 반미 투쟁을 전개하라는 지령, 2021년 6·1 지방선거에서 진보정당 후보 지지운동을 하라는 지령을 받아 일부 이행했다고 한다. 보도는 ‘방첩당국’의 ‘영장’과 ‘판단’을 따라 “특히 진보당 제주도당, 민주노총제주본부 4·3통일위원회, 전농 제주도연맹, 제주지역 반전평화옹호단체”들이 포섭 대상이었다고 공개 지목하기도 했다.

조선일보 1월 9일자 3면 보도.
조선일보 1월 9일자 3면 보도.

이어지는 ‘간첩단 사건’ 보도들은 출처와 내용이 비슷하다. 제주뿐 아니라 창원과 전주 등 다른 지역의 ‘북한 지령을 받은 지하조직’ 수사가 진행 중이라는 보도(<“제주 간첩단, 북한 지령 받고 투쟁” 창원·전주 지하조직도 압수수색>문화일보), 지난 10일 <중앙일보>의 <간첩단 'ㅎㄱㅎ' 6·1 지선 개입 의혹…"김정은 호칭은 총회장님">처럼 시민단체들의 6·1 지방선거 당시 진보정당 후보 지지 선언을 ‘간첩단 지선 개입 의혹’으로 명명하여 확대·재생산한 보도 등 대동소이한 내용에 자극적이고 반복적인 묘사를 붙이는 보도가 쏟아지고 있다.

<문화일보>는 지난 9일에 <'북한 지령’ 간첩단, 창원에 중앙거점… 방산업체 대거 해킹 정황 드러나>에서 ‘방산업체 대거 해킹 정황’이라는 무시무시한 제목을 달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보도 본문에서 ‘해킹 정황’ 언급은 “국가정보원과 경찰 등 방첩당국이 북한 연계 조직이 경남 창원에 중앙거점인 ‘자주통일 민중전위’(약칭 ‘자통’)란 반정부단체를 설립한 뒤 방산업체들을 대거 해킹한 정황을 파악하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라는 문장이 전부다. 나머지는 “2021년 청주 간첩단 사건과 설립 시기, 접선방법, 지령 내용 등이 유사하다”, “방첩당국은 중앙거점인 자통이 수도권이 아닌 방산업체가 밀집한 창원에 세워진 점에 주목하고 있다”와 같은 ‘방첩당국의 시선과 추정’을 나열하며 마치 이미 간첩이 확인이라도 된 것처럼 군불을 떼는 내용들이다. 

이런 보도들의 목표는 명확하다. 우리 사회 곳곳에 간첩이 암약 중이라는 ‘공안정국’ 조성, 그리고 그 ‘사회 곳곳’이 하필 민주노총, 전농, 진보정당, 시민단체라는 ‘좌표찍기’다. 무려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 및 가입’이라는 징역 5년 이상의 중범죄를 두고도 아직 구속된 사람이 없고 고작 작년 말 두 번 압수수색을 했으며 아직도 혐의를 “따져보고 있다”는 사건을 보도하고자 한다면 ‘국정원발 압수수색 영장’보다는 더 많은 취재를 했어야 한다. 더구나 함께 언급된 ‘포섭 대상’인 민주노총와 진보정당, 전농 등은 아예 아무런 혐의점도 없이 이름만 공개됐다. 이는 사정기관의 입장, 추정, 판단을 그대로 받아쓰는 언론의 고질병이며, 사실관계와 무관하게 부당한 보도들이다. 

이번 ‘간첩단’ 보도의 경우 다른 속내도 있다. 주로 의견기사에서 드러나는 언론의 속내는 사실상 현 정부와 국정원의 의지를 내면화한 수준이다. 지난 9일자 <매일경제> 사설 <진보정당 간부 낀 간첩단 적발, 사회 암약 불순세력 이뿐이겠나>는 이미 제목에서 간첩단 혐의가 확정된 것처럼 묘사하며 ‘사회 암약한 불순세력이 곳곳에 있다’는 식으로 공포를 조장했는데 다수의 사설이 이렇다.

<문화일보>에 지난 10일 게재된 <간첩 발호와 대공수사권 환원 당위성> 칼럼은 한 발 더 나아간다.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이 경찰로 넘어가면 국가 대공수사 능력이 대폭 약해지고, 북한 간첩 공작 부서의 숙원 과제를 풀어 주는 결과가 된다”, “간첩 수사에는 적의 공작망을 유인하는 역용(逆用)공작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공개 조직인 경찰은 이런 수사 공작에는 부적합하다” 등 내년 1월 1일부터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이 경찰로 이관되는 것을 다양한 이유로 비난했는데 그 면면이 끔찍하다.

‘시민단체 관계자’로 구성된 안보수사심의회가 수사를 검토하니 대공수사에 부적합하다는 건 ‘시민단체’는 대공 수사 대상으로 의심해야 한다는 낙인이다. ‘안보사범’과 ‘자생적 반국가행위 사범’은 북한과 연계가 확인되지 않아도 ‘채증’해야 한다는 주장은 북한에서나 들어볼 법한 ‘항시적 감시국가 체제’에 가깝다.

이런 이유로 국정원에 대공수사권을 돌려줘야 한다면 국정원이 과거에 소련 비밀경찰 수준의 괴물이었다고 인정하는 꼴밖에 안 된다. 이런 주장이 ‘국정원발 간첩단 사건’ 보도와 함께 버젓이 의견기사로 나가는 게 우리 언론의 현실이다. 

한국일보 1월 10일자 5면 기사.
한국일보 1월 10일자 5면 기사.

 

이성적 보도가 없는 건 아니다. <한국일보>는 지난 10일 <"문 정부 때 못해" 국정원 동시다발 간첩 수사...공안정국 조성 논란>에서 국정원이 갑자기 5~10년 묵은 ‘간첩 수사’를 동시다발적으로 터뜨린다며 ‘대공수사권 경찰 이관’을 막기 위한 국정원의 여론전이라 의심했다.

또한 “경찰에 신고한 공개 집회까지 친북활동으로 수사를 받았다”, “통일운동을 하다 알게 된 사업가와 이메일을 주고 받은 게 기소의견으로 송치됐다”는 수사 대상자들의 반론도 달았다. 이 정도 상식적인 의문을 던지고 ‘반론 보장’이라는 기본까지 지킨 보도가 극소수라는 게 ‘갑툭튀’한 ‘간첩단 보도’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다. 

‘간첩 사건’과 같은 치명적 사안을 보도하고자 한다면 그에 부합하는 치밀하고 명확한 취재를 동반해야 한다. 그래야 ‘포섭 또는 침투 대상’이 된 민주노총과 진보단체들을 ‘불순세력’으로 매도하는 불상사를 피할 수 있다. 아무리 미워도 그들 역시 국민이며, 간첩 사건의 피해자일 수 있다는 당연한 상식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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