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살인에 침묵한 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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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필독도서 61] '가족의 무게'

지난 1월 27일 SBS '12뉴스' 보도 화면 갈무리.
지난 1월 27일 SBS '12뉴스' 보도 화면 갈무리.

[PD저널=오학준 SBS PD] 스물여섯의 엄마는 앞으로 38년간 이어질 간병의 끝이 이런 모습이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지적장애 1급으로 진단받은 딸의 곁을 지키기 위해 간이침대 위에 몸을 누이고, 불면증에 시달리면서도 노트에 빼곡히 간병일지를 적어가며 딸의 상태를 살피던 엄마였다.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는 딸에게 자기 삶을 내어준 대가는 예상 밖으로 가혹했다. 암으로 인해 딸의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자 엄마의 마음은 무너졌다. 상황에 내몰려 딸을 죽이고, 자신도 따라 죽으려다 미수에 그쳤다. 검찰은 엄마에게 살인죄로 12년을 구형했다. 

얼마 전 우연히 이 기사를 읽었고, 원래 읽으려던 책을 덮었다. 대신 이시이 고타의 <가족의 무게>를 다시 꺼내 읽었다. 일본의 저널리스트 이시이 고타는 줄어드는 일본 내 살인 사건의 숫자에 비해, 가족을 중심으로 한 살인 사건의 숫자가 비교적 꾸준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살인이라 하면 흉악한 범죄자들을 떠올리지만, 사실 대부분 가까운 가족이 그 범죄의 주인공이 된다. 이유가 궁금해진 그는 2015년부터 6년간 벌어진 가족 살인 사건을 추적한다. 법원 재판을 방청하고, 유가족을 만나 사건들을 관통하는 특징을 찾아내려 시도한다.

그에 따르면, '중과부적'의 상황에 놓인 가족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가족들을 해친다. 밥을 주지 않아 굶겨 죽이기도 하고, 동반자살이란 이름으로 아이들을 죽이기도 한다. 다양한 외양을 가진 끔찍한 사건들의 밑바닥엔 공통점이 있다.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는 난처한 상황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고, 사건이 일어날 때 간병, 육아와 같은 주된 문제 이외에도 그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고유한 갈등이 있다. 가족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가는 사회·경제적 문제들은 반드시 가족 내의 갈등을 타고 폭발한다. 

은둔형 외톨이가 100만 명을 상회하고, 간병해야 하는 노인이 600만 명이 넘어가는 일본에서 (그리고 비슷한 상황에 놓인 한국에서도) 이들을 감당할 수 없는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비극이 늘어나고 있다. 인구 노령화가 진행되면서 자식들도 함께 늙어가다 보니, 문제를 감당해야 할 가족이 허약해지는 경우도 늘고 있다. 게다가 코로나 이후 '뉴노멀'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벌어지는 재택근무, 실업, 저출산, 보험료 증가 등의 현상은 가족 구성원을 위기로 내몬다.

일본 저널리스트 집필한 '가족의 무게'
일본 저널리스트 이시이 고타가 집필한 '가족의 무게'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 할수록, 실패했을 때 받는 타격은 커진다. 그가 추적한 사건들에서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이들은 최선을 다했다. 은둔형 외톨이인 자식의 응석을 수십 년간 받아주기도 하고,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가족 구성원을 보듬어 안기 위해 버티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노력을 가족 살해라는 파국으로 돌려받았다. 고통을 끌어안고 살다가 고통에 뒤틀려 변형되고, 끝내 구성원 모두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사례들이 책 속에 계속해서 이어진다. 읽는 일조차 버거운 순간들이 많았다.

앞서 읽은 기사에도 자세히 소개되어 있었지만, 38년간의 간병 이후 딸의 목숨을 빼앗은 살인 사건에도 구체적인 가족의 사정이 있다. 그리고 그 가족의 갈등을 파고드는 사회의 문제가 있다. 다른 가족 구성원들도 있었지만, 간병은 엄마의 몫이었고, 엄마는 자기 삶을 간병에 송두리째 바치는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간병인 지원 사업은 신청 조건이 까다롭거나 공지조차 없었다. 사회는 고립된 개인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고, 개인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극단적인 선택에 내몰렸다. 물론 그 선택이 온당하진 않았으나.

사정을 알면서도, 징역 12년을 구형한 검사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댓글들에 가득하다. 가혹하다는 거다. 하지만 검사의 처지를 생각해 보자. 자기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절대 가볍지 않고, 자칫 가벼운 처벌로 살인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사람들에게 퍼트릴 위험도 있다. 그땐 검사가 책임질 수 있을까? 구형은 그러니 엄격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구형을 비난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볼 게 있다.

이 사건에서 세상을 떠난 딸은 입장을 대신 말해줄 사람이 없었다. 이 사건의 서사에서 장애를 입은 딸은 엄마를 '괴롭히는' 존재로서만 등장하고, 엄마는 그런 딸로 인해 자신의 인생을 잃고 고통받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사람들이 보여주는 동정은 후자에 집중된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나, 세상에 그렇게 오래 버티다니 대단하다 같은 말들을 댓글에서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런데, 세상을 떠난 딸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 죄인가? 그를 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의 존재가 아니라, 그를 가족 구성원이 홀로 감당하게끔 만드는 이 세상이 아닌가? 만약 그가 오늘 한국이 아닌 곳에 살고 있었다면, 그와 그의 엄마는 지금과 같은 결과를 맞이했을까? 안타까운 사연이니 죄를 사하라 말하기 전에, 왜 그것이 죄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먼저 물었어야 했다.

문제는 사회 제도가 한 사람에게 등을 돌린 대가를 혼자서 져야만 하는 시스템이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채 간병의 고통을 홀로 감당하던 사람이 저지른 범죄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도 책임이 있다. 물론 법은 행위의 책임을 구체적인 행위자를 향해 돌릴 수밖에 없음을 안다. 그러니 법을 꾸짖기 전에, 그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 전에 도움을 줄 수 있었을 시스템을 왜 우린 빨리 고안하지 못했나 생각해야만 한다.

세상이 엄마의 죄를 나눠서 져야 한다는 목소리는 잘 들리지만, 그것이 당신의 침묵과 무관하지 않다는 목소리는 작다. 사회나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당신과 나도 그 책임져야 할 주체의 일부다. 그렇기에 "가족의 문제가 공적 지원을 받거나 스스로 노력하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올 한 해 발달장애 자녀를 둔 부모의 극단적인 선택이 10건이 일어났다. 그 사이 세상의 긴 침묵은, 나의 침묵이었다.

얼마 전 법원은 이 사건에 이례적으로 집행유예를 선고하며 “장애인을 돌보는 가족들은 국가나 사회 지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오롯이 책임을 지고 있다”라며 “이번 사건도 피고인 탓으로만 돌리기 어렵다”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동시에 법원은 “아무리 어머니라고 해도 딸의 생명을 결정할 권리는 없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판결이 미담으로 남는 사회가 아니라, 법원의 문턱을 넘어야만 하는 사건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 사회가 조금 더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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