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당한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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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필독도서 65] '가족을 폐지하라'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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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오학준 SBS PD] 소설가 어슐러 르 귄은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 “모든 행복한 가족은 고만고만하게 행복하고, 불행한 가족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가 훌륭하긴 하지만 그 말을 뒤집어야 더 진실되다고 말했다. “불행한 가족이 구조적인 의미에서 다 똑같고, 행복한 가족은 기적적인 예외라면 어쩔 것인가?”

아늑해야 할 집이 돌연 지옥이 되고, 나를 지켜줄 보호자가 돌연 가해자가 되는 경험은 비단 창작물 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영화 <샤이닝>의 잭 토렌스는 아들을 죽이는 데 실패하고 미로 속에서 얼어 죽었지만, 현실에선 아버지가 종종 ‘성공’한다. 

극단적 폭력만이 아니다. 행복한 가족의 밑바닥엔 누군가의 희생과 억압, 포기와 상실로 이루어진 ‘하부구조’가 도사리고 있다. 만약 그럼에도 당신이 사랑과 관심을 듬뿍 받고 자랐다면, 당신은 드물게도 운이 좋거나 바로 그 희생의 대가로 자라난 사람이다. 

물 위를 고요히 헤엄치는 오리의 다리가 바삐 움직이듯이, 행복한 가정에는 저마다 고유한 희생이 있다. 한 번도 수면 위로 드러나지 못하는 고된 노동의 담당자는 보통 아내이자 어머니의 몫이다. 가족 구성원의 돌봄을 무급으로 감당하는 동시에, 그 스스로도 가계를 유지하기 위해 생산 노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소피 루이스의 <가족을 폐지하라>는 이 오리의 다리에 주목한다. 자본은 돌봄 노동의 비용을 줄이고 가부장은 침묵의 대가로 가족이란 소왕국을 지배한다. 임금노동을 하는 임금님을 위해, 행복한 가족이 유지되어야 한다면 그 가족이 지켜야 할 만한 가치가 있을까? 자연적 본성이나, 모성애, 고향과 같은 다양한 환상들로 지탱해야 할 만큼, 가족이 가치가 있는가? 소피 루이스는 가족이 사랑과 돌봄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끔찍할 정도로 무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폐지하자는 것이다.

그는 가족이 거대한 무급 노동의 원천으로서 자본주의 국가를 지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바탕으로 결혼을 하고, 아내는 무급의 돌봄 노동을 그리고 남편은 가족을 부양하는 임금 노동을 전담하는 형태의 ‘핵가족’은 구조적 차별을 자연적인 질서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그가 보기에 가족이 제공한다는 돌봄, 나눔, 사랑의 가치는 가족이 아니어도 제공할 수 있다. 오히려 가족이라는 혈연과 사적 소유에 기초한 제도를 통해서는 사랑과 친밀함이 학대나 소유욕으로 전도될 뿐이다.

소피 루이스가 쓴 '가족을 폐지하라'
소피 루이스가 쓴 '가족을 폐지하라'

가족 폐지론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다양한 운동 속에서 꾸준히 언급된 주제다. 멀리는 19세기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인 샤를 푸리에가 있고, 1920년대 콜론타이와 같은 공산주의자들, 1960년대의 급진적 페미니스트들, 그리고 오늘날의 퀴어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가족은 꾸준한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인륜을 저버린 급진주의자란 반대에 직면했다.

다시 소피 루이스가 이 오래된 역사를 언급하며 논의를 재개하는 것은, 팬데믹의 경험이 영향을 미친 것처럼 보인다. 정부는 방역을 위해 ‘안전한’ 집으로 돌아가라 명령했지만, 정작 집이 안전한지 묻지 않았다. 가해자들이 다시 사적인 공간으로 복귀하면서, “파트너와 피부양자들을 들볶고 구타했지만 처벌받지 않는 일이 더 많아졌다.” 바로 지금이, 우리가 더 나은 돌봄 체제를 고민할 시기인 것이다.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부모가 자식의 삶을 뒤흔들고, 원치 않은 양육을 감당하기 싫어 아이의 목을 조르면서도, ‘핏줄’을 내세우는 데 진절머리가 나는 것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안식처가 반드시 핏줄로 짜인 그물침대일 이유는 없다. 그러니 모든 것에 앞서는 핏줄은 없다는 주장에는 어쩌면 손쉽게 동의할 수 있다. 문제는 ‘폐지’다. 그 스스로 인정하듯 이것엔 어느 정도 으스스한 뉘앙스가 배어 있다.

그가 말하는 가족의 폐지란, 우리가 지금 유지하고 있는 관계의 파괴가 아니다. 가족 구성원을 강제로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어 수용소에 가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핵가족만을 정상적인 구성으로 받아들이는 법적, 경제적 구조의 변화이며, 돌봄 관계를 확산하는 문제다. 혈육이 아니어도 돌아가 몸 뉘일 곳, 마음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있는 곳을 만들자는 이야기다. 

그리하여 “혈연과는 무관한 의존과 필요와 지원의 구조”를 구축하길 요청한다. 소책자이기에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선 명확히 윤곽이 드러나진 않는다. “인간으로서 함께 지내기와 인간의 분리를 중단하는 것”이라는 함축적 문장은 읽는 이들의 구체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동의하기에 쉽지 않은 문장들도 곳곳에 있다. 다만 도발적 문장들을 경유하며, 지금보다 가족이 조금 덜 필수적인 사회를 꿈꿔볼 수는 있을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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