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들이 말하는 논픽션의 성패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비필독도서 73] '논픽션 글쓰기 전설들'

[PD저널=오학준 SBS PD] 픽션은 개연성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 오늘날 픽션의 문제다. 그리고 개연성은 9·11 테러 같은 사건을 본 사람들이 처음 떠올릴 단어는 아니다.(톰 울프)  해가 느리게 지고 달빛이 굴절 없이 비추던 시절엔 밋밋한 현실에 독을 부어 소설을 쓰곤 했다. 그런데 지금 세상에는 현실의 독이 너무 지독해서 물을 타지 않으면 소설이 되지 않는다. (이병주) 

오늘날 논픽션이 인기를 얻는 장르가 되었다는 사실은, 세상이 더 이상 개연성 없는 충격적인 사건들의 연속체가 되었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소설가가 공들여 개연성을 불어넣은 이야기는, 상상을 뛰어넘는 현실 앞에서 무기력함을 드러낸다. '소설보다 소설 같은' 이야기라는 농담엔 냉소가 한가득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멸망을 지켜만 보고 있다.

고통을 판매하고 중계하는 일이 저널리스트라는 보부상의 본질이다. 그 마음에 충실하려는 태도가 확고한 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한편으로는 흥분하면서도 어딘가 한쪽 마음 구석이 서늘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세계가 고통으로 가득한 오늘날, 논픽션 작가들이 스스로의 삶을 위해 타인의 고통을 더 잘 팔고자 노력하겠다는 다짐 이면이 궁금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무엇인지 그 고민의 결과를 듣고 싶었다.

논픽션이라는 용어는 모호하다. 애초에 '픽션이 아닌' 것들의 집합이므로. 그 용어의 자장 아래에서 글쓰기를 감행하는 이들조차 통일된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는 듯하다. 대부분이 동의할 수 있는 대강은 있다. 논픽션도 이야기이며, 이를 쓰기 위해 가져오는 재료가 '상상'보다 취재에 기초한 '사실'에 더 의존한다는 것. 엮는 방식, 지향점, 문체는 제각각이다. 어떤 저널리스트에게 논픽션은 기사의 연장선, 다른 이에겐 문학의 하위 장르다. 유머를 섞는데 거리낌이 없는 이가 있고, 죽은 자의 시선에서 바라보길 감행하는 이가 있으며, 기록으로서 충실하려는 이도 있다. 

<논픽션 글쓰기 전설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곤혹스러움이다. 자신이 재료로 삼는 세계로부터 글 쓰는 이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데에서 오는 당혹감과 이를 해소하기 위한 각자의 발버둥(혹은 자기 정당화?)이 담겨 있다. 논픽션을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는지를 배우는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논픽션이라는 장르를 시도하려는 이들의 고단한 처지를 드러내는 분투의 기록이다. 

'논픽션 글쓰기 전설들'
'논픽션 글쓰기 전설들'

논픽션을 왜 시도해야 할까? 그것이 이 세계에 필요한 이유는 뭘까? 논픽션의 힘을 믿고 좋아하는 나는, 내가 속한 세계를 재료로 삼는 작업의 알리바이를 만드는 게 필요했다. 이 책은 그 단초를 제공한다. 왜 저널리스트가 끝내 논픽션을 쓰고자 하는지, 그 욕망의 흔적을 책 이곳 저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중 가장 내가 동의할 수 있었던 정당화는 이문영의 것이다.

도처에 존재하는 일상화된 고통은 너무 흔하여 기삿거리가 되지 못한다. 기자 개인은 매일 많은 기사를 써야 하고, 마감이라는 물리적 한계로 인해 사실 확인에 어려움을 겪는다. 언제든 닥쳐올 소송의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현실은 저널리스트들의 의지를 체계적으로 좌절시키는 구조다. 그러니 누군가 죽거나, 다칠 만큼 예외적이지 않으면 사건은 사건이 되지 못한다. 심지어 그마저도 반복되면, <고통 구경하는 사회>의 저자 김인정의 표현대로 ‘문화’가 된다.

모두가 서로를 용서하는 기막힌 일이 일어난다. 개인의 저항은 숭고하지만 산발적이다. 일상이 되어버린 고통은 뉴스 값어치가 없다는 암묵적인 합의는 깨지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저널리스트로 일하는 이들이 지니는 일상적인 비겁함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라고 본다. 자기가 문제라 생각하는 것들이, 기사화의 과정에서 탈락되는 일이 빈번해질수록, 저널리스트들은 새로운 언어를 찾고자 발버둥 친다. 논픽션이라는 수단을 택할 동기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뉴스는 읽혀야 효과가 있다. 팔리지 않는 콘텐츠는 침묵이다. 어떻게하면, 사람들이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지 고민한 끝에 도달한 저널리스트의 필사적인 언어가 논픽션이다. 이야기에 끌리는 인간의 본성을 이용해 재미있는 이야기로서 뉴스를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 그 과정에서 기존의 작법은 위반의 대상이 된다. "소설 쓰냐?"는 빈정거림은 칭찬에 가깝다. 특종에 욕심을 내야 한다는 조갑제 기자의 말은 적나라하지만, 그럼에도 진실을 담고 있다.

선은 있다. 취재한 사실을 오도하지 않을 것, 취재하지 않은 내용을 미리 단정짓지 않을 것, 이 수단이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지 잊지 말 것. 논픽션은 언제나 그것이 목소리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 쓰일 때에만 정당하리라는 믿음이 있다. 충격적인 사건을 만들어 낸 원인에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그 원인을 해결하고자 하는 충동을 유발하기 위해서 논픽션은 쓰인다. 사람들의 기대와 관심은 그 정당화 속에서만 유지된다.

자신이 취재하는 세계의 구원에 한 발짝 다가가기 위한 수단으로서, 논픽션은 쓰여야 한다. 자기가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말을 기다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임을 잊어선 안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논픽션은 타인의 고통을 바탕으로 부와 명예를 쌓는 방법이라는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영화 <펄프 픽션>의 삭제된 캠코더 신에는 이런 대화가 있다. 당신은 듣는 편인가요, 말하려고 시도하는 편인가요. 책 속에서 이문영도 비슷한 말을 한다. “인터뷰는 질문이라고 보통 생각하잖아요. 인터뷰 관련 책도 다 질문을 어떻게 잘 할 것인지를 다루죠. 그런데 저는 질문만큼 중요한 것이 잘 듣는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이야기는 질문과 무관하게 나오는 것 같거든요.” 

그들은 듣는 편인가, 말하는 편인가. 논픽션의 성패가 여기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