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다시...KBS 앞에 선 세월호 유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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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10주기 다큐 불방 철회' KBS 앞 촛불집회에 120여명 모여
세월호 유가족, 박민 KBS 사장에 면담 요청..."26일까지 회신"

 

21일 저녁 7시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열린 '세월호 10주기 다큐 방영 촉구 시민 촛불 집회'에서 시민들이 촛불과 피켓을 들고 있다. 이날 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120여 명의 시민이 참여했다. 촛불집회는 매주 수요일 저녁 7시에 열릴 예정이다. ⓒPD저널 

[PD저널=엄재희 기자] "이 다큐멘터리가 예정대로 방송되어서 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아가는지 국민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부모는 옆에서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 눈물을 닦아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2024년 2월 21일 저녁 7시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 마련된 차량용 무대 위에 오른 단원고 2학년 7반 고(故) 정동수 군 아버지가 울분에 찬 목소리로 외치자, KBS 앞에 모인 참석자들은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눈발이 내리는 밤거리에서 120여 명의 시민들은 촛불과 피켓을 들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지난 15일 이제원 KBS 제작1본부장이 '총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오는 4월 18일 방영 예정이던 세월호 참사 10주기 다큐멘터리를 연기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날 항의 촛불집회까지 이어졌다. KBS <다큐인사이트> 제작진은 총선 8일 뒤 방송이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반박했지만, 이 제작본부장은 끝내 제작 중단을 지시했다

피켓 시위 현장에 시민들과 함께한 <다큐인사이트> 이인건 KBS PD는 "오늘 오후 이 제작본부장으로부터 더 이상 제작이 불가능하고 방송도 할 수 없다는 답을 들었다"며 "이 자리에 계신 분들께 죄송하다"고 했다. 이어 "이 다큐는 단원고 생존자 A씨의 지난 10년과 현재에 관한 인터뷰로 참사 피해자의 삶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내용"이라며 "제작본부장에게 묻고싶다. 이 방송을 정치적으로 바라보고 이용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라고 비판했다.

21일 저녁 7시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열린 '세월호 10주기 다큐 방영 촉구 시민 촛불 집회' 모습 ⓒPD저널 
21일 저녁 7시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열린 '세월호 10주기 다큐 방영 촉구 시민 촛불 집회'에서 단원고 2학년 7반 故 정동수 군 아버지가 발언을 하고 있다. ⓒPD저널 

10년 전에도 세월호 유가족은 KBS 본관 앞에서 비슷한 내용의 피켓을 든 적이 있다. 지난 2014년 세월호 참사로 사회적 충격에 빠져있을 당시, KBS의 보도 책임자인 김시곤 KBS 보도국장이 "세월호 사고는 한꺼번에 죽어서 그렇지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 수를 생각하면 많은 건 아니다"라는 발언을 해 많은 이들의 가슴에 상처를 냈다. 참사 '전원 구조' 오보와 현장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언론을 향한 불신에 기름을 끼얹는 말이었다.

당시 이 소식에 분노한 세월호 유가족들은 영정 사진을 들고 안산 분향소에서 여의도에 위치한 KBS를 향했다. 이들은 길환영 당시 KBS 사장과 김시곤 보도국장과 면담을 요구했지만, 맞이한 건 줄지어 막아선 경찰버스와 경찰들이었다. 갈 곳을 잃은 유족들은 청와대로 향했으나, 그곳에서도 경찰에 막혀 길 위에서 밤을 지새웠다. 

KBS의 세월호 '보도 참사' 사태는 2020년이 되어서야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김시곤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해경 비판 보도를 빼달라'고 지시한 사실이 인정돼 일부 사법적 처벌을 끌어한 바 있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 10년째 되는 해 또다시 유족들은 세월호 참사를 두고 논란의 중심에 선 것이다.

이날 발언에 나선 박미정 씨(서울 강서구)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 말은 대한민국에서 통하지 않는 것 같다"며 "세월호 당시 시민들은 '기레기'라는 단어를 만들었는데, 이젠 이 말이 아까울 정도로 언론과 방송이 망가졌다"고 했다.

주최 측은 다큐 불방 결정이 철회될 때까지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KBS 본관 앞에서 촛불집회를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국민을 위한 방송하겠다'는 다짐...물거품되나
이번 '세월호 다큐 불방 사태'로 세월호 참사 후 언론의 행동을 반성하며 퇴행을 막겠다던 언론인들의 다짐과 각계각층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22일 오전 세월호 유가족과 293개의 시민단체가 연대해 KBS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10년 전에도 가족분들이 이곳에 모이셨고 KBS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아이들의 영정 사진을 머리 위로 올리고 호소하던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며 "당시 언론이 사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다는 국민이 많았고 지난 10년간 이를 바로잡기 위해 많은 분들이 애썼지만, 이제 다시 물거품이 되는 것 아닌지 걱정된다"고 했다.

22일 4.16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와 4.16연대는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세월호참사 10주기 KBS 다큐 불방 규탄 및 방영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PD저널
22일 4.16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와 4.16연대는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세월호참사 10주기 KBS 다큐 불방 규탄 및 방영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PD저널

세월호 유가족들은 입장문을 통해 "세월호 참사 10주기 다큐 불방은 하나의 프로그램 방영이 중지된 것이 아니라 국가책임을 물어야 하는 언론의 역할이 중지된 것이며, 재난참사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할을 포기한 것이며, 세월호참사의 책임을 회피하고자 정권의 대리인 역할을 자임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날 유가족들은 박민 KBS 사장과의 면담을 요청했으나, KBS 관계자가 대신 나와 사장 일정을 조율하고 26일까지 면담 가능 여부를 공문으로 알려주겠다고 했다. 기수별 릴레이 비판 성명을 내고 있는 KBS PD들은 27일 TV편성위원회를 열어 이번 불방 사태에 항의할 예정이다. 그러나 편성위원회가 편성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고, 이제원 제작본부장이 지난 1월 중순까지 위원장으로 있던 보수성향의 KBS공영노조가 20일 "그날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것은 단순 해난 사건이었는데 우리사회 좌익 세력들은 엉터리 음모론과 마타도어로 대통령을 공격했다. 세월호 아이템은 더 신중해야 한다"는 논평을 내면서, 방송 여부는 더욱 불투명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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