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합된 대표팀 갈등...여론몰이 열중한 언론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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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협회·클린스만 감독 책임 덮어놓고 다수 언론 '선수 탓'

지난 7일(한국시간) 카타르 알라이얀 아흐마드 빈 알리 스타디움 열린 2023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요르단과의 준결승전 당시 손흥민과 이강인 선수의 모습. ©뉴시스
지난 7일(한국시간) 카타르 알라이얀 아흐마드 빈 알리 스타디움 열린 2023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요르단과의 준결승전 당시 손흥민과 이강인 선수의 모습. ©뉴시스

[PD저널=이봉우 미디어인권연구소 뭉클 객원연구원] 주로 정치·사회 뉴스에서 보이던 출처 불명의 ‘여론 재판’ 보도가 느닷없이 축구계에서 등장했다. 영국의 대표적인 황색 언론 <더 선>(<The Sun>)이 유포한 대표팀 선수단 내분을 익명의 ‘축구협회 관계자’가 ‘인정’하며 살을 붙였고, 여기에 국내 언론은 자극적인 ‘갈등 드라마’를 쏟아냈다.

당사자의 입장이나 설명도, 정확한 사실관계 확인도 없는 보도로 선수들을 막장 드라마 주인공으로 만들었고, 실제로 몇몇 선수들은 극단적인 악플 세례 등 곤욕을 치렀다. 민망하게도 언론이 만든 그 드라마의 핵심 플롯은 ‘외국에서 자란 어린 선수가 감히 고참 형들에게 대들었다’는 것에 불과하다. 소위 ‘꼰대질’로 선수들을 ‘여론 재판’으로 몰아낸 언론 보도 사이로 축구협회와 클린스만 전 감독은 빠져나갔다. 

사태의 발단은 우리 시각으로 14일 이른 오전에 나온 <더 선>의 보도이지만 곧바로 이를 받아쓴 한국 언론의 초기 보도부터 파국은 예견됐다. 연합뉴스는 <"손흥민, 요르단전 전날 이강인 등과 다투다 손가락 탈구>에서 “탁구를 치려고 일찍 자리를 뜬 어린 선수”을 향해 "손흥민이 선수들에게 돌아와서 앉으라고 했지만 일부 선수가 무례하게 이야기"했고, "순식간에 다툼이 벌어졌고, 동료들이 뜯어말렸다. 이 과정에서 손흥민이 손가락을 심하게 다쳤다"는 외신 보도를 인용한 후 “대한축구협회도 당시 선수들 사이에서 다툼이 있었다고 인정했다”고 전했다.

축구대표팀의 내밀한 사정을 한국 언론도 아닌 영국의 가십 언론이 출처 불명으로 폭로했는데 이를 대한축구협회가 공식적인 설명도 없이 언론에 ‘인정’하고 <더 선>보다 더 구체적으로 ‘선수 간 다툼’을 묘사하는 기이한 그림이 이때부터 펼쳐졌다. 

이후 실시간으로 이어진 <손흥민 멱살잡자 이강인 주먹질…원팀은커녕 사분오열 태극전사>(연합뉴스)]와 같은 보도는 <더 선>이 ‘언쟁’ ‘다툼’ 등 모호하게 표현한 선수 간 갈등을 익명의 ‘축구협회 관계자’, ‘축구계 관계자’ 등을 출처로 상당히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한국 언론이 ‘익명’으로 덧붙인 정황은 △‘격분한 손흥민이 이강인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자 이강인이 주먹을 휘둘렀다’ △‘손흥민은 주먹을 피했지만 이 과정에서 손가락을 다쳤다’ △‘손흥민 등 고참 선수들이 이강인의 선발 명단 제외를 요청했으나 클린스만 감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래 대표팀에는 젊은 선수 VS 고참급 선수들 사이의 갈등, 국내파 VS 해외파 선수의 갈등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사분오열’ ‘주먹질’ ‘예견된 파국’ ‘하극상’ 등 자극적인 제목까지 붙였지만 정작 당사자 선수들의 입장이나 해명은 담기지 않았다. 

실제로 이강인 선수와 손흥민 선수가 몸싸움을 벌였는지 사실 여부에 여론의 이목이 집중됐고 많은 축구 팬들이 축구협회를 출처로 의심하기도 하지만 이는 본질이 아니다. 언론의 습관화된 구태, 거기에 덧발라진 영혼 없는 상업성이 본질이다. 언론은 ‘익명 출처 보도’라는 고질적 폐습을 이번에도 반복했으며 특정한 젊은 선수를 목표물로 삼았다는 점에서 더욱 저질이다. 

<“손흥민이 멱살 잡자 이강인 주먹질”... 요르단戰 전날 무슨 일>(조선일보, 2.14.)의 경우 ‘축구계 관계자’를 앞세워 ‘주먹질’의 원인을 “스페인에서 성장한 이강인이 정서적인 면”으로 지목하는가 하면 “훈련장에선 한 유럽파 공격수가 자신을 강하게 몰아붙인 K리거 수비수에게 불만을 품고 공을 강하게 차며 화를 내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며 마치 대단한 갈등이 상존한 것처럼 ‘직관 썰’까지 풀었다. 무려 ‘아시안컵 우승 숙원을 망친 하극상’의 원인이 ‘스페인에서 자라 선배들과 부딪히는 젊은 선수’ 탓이고 ‘훈련 중에 몸싸움으로 발생한 갈등’이라니 영국 황색 언론 <더 선>조차 상상 못할 ‘동방예의지국’의 ‘가십 기사’다.

조선일보 2월 15일자 2면 기사.
조선일보 2월 15일자 2면 기사.

다양한 선수들이 한시적으로 모여 합숙 훈련을 하고 거친 몸싸움이 90분 내내 펼쳐지는 축구팀에서 갈등과 거친 훈련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대서특필할 일도 아니고 애초 언론에 흘러나오기도 어려운 일상이다. 더구나 정확히 사실 확인, 당사자 확인도 없이 ‘스페인에서 자라서 버릇이 없다’라는 식으로 선수 한 명을 낙인찍어 ‘하극상 드라마’를 쓸 일은 더욱 아니다. 

일상 속 선수들의 갈등을 조율하고 선수단 관리, 지원에 책임이 있는 축구협회와 클린스만 감독은 하루가 지난 15일이 되어서야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선수들이 집중포화를 받는 사이, 축구협회는 유유히 감독 경질을 논의했고 감독은 화상으로 참여해 “이강인·손흥민 때문에 경기력 안 좋았다”라는 말을 남기며 ‘선수단 마녀사냥’을 부추겼다.

이 기상천외한 사태에 이르러 언론도 축구협회와 감독을 비판했다. JTBC는 지난 14일 <멱살잡이까지 간 전말은?…대표팀 관리도 안 된 클린스만 리더십 붕괴>에서 감독과 협회의 ‘관리 책임’을 지적했고, 15일 단독으로 보도한 <'경질' 입 모은 전력강화위…클린스만 "이강인·손흥민 때문에 경기력 안 좋아">에서 클린스만 감독의 ‘선수 탓’을 가장 처음 알렸다. 

일부 보도가 협회와 감독을 비판했다고 해서 책임을 덜 수는 없다. 클린스만의 ‘선수 탓’을 제일 처음 보도한 JTBC 역시 19일까지 <KT 이어 이강인 광고 내린 '아라치 치킨'…손흥민에 하극상 후폭풍>와 같은 기사를 내며 ‘미확인 주먹질 하극상 드라마’ 어뷰징에 편승했다. ‘정말 주먹질까지 오간 게 맞느냐’ ‘주먹질까지 오갔다고 한들, 그게 특정 선수를 여론재판으로 몰아갈 일이냐’는 질문이 사라진 채, 언론은 폭주했다.

<손흥민에 웃은 '메가커피'…이강인에 눈물 '아라치 치킨'>(서울경제, 2.19)등의 기사가 사태 일주일이 지나도록 이어지면서 이강인 선수를 대표팀은 물론 기업에도 피해를 주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16일 경질된 클린스만 감독과 코치진은 독일 언론에 또 선수 탓을 하며 수십 억원 위약금을 챙긴 채 유유히 떠났다. 축구협회는 몇몇 선수가 비난의 화살을 받는 사이, 차기 감독 선임 국면으로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영국 황색지 <더 선>을 따라 젊은 선수들의 ‘일상’과 ‘사생활’을 파고들어 선수 개인의 인권과 커리어는 물론 대표팀마저 파국으로 몰고 간 언론에 기시감이 든다. 그리 멀지도 않다. 16일 카이스트를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에게 ‘연구개발 예산을 복원하라’고 외쳤다가 ‘입틀막’을 당하고 사지가 들려 쫓겨나 감금된 카이스트 졸업생에 다수 언론은 곧바로 ‘소란 일으킨 졸업생, 알고 보니 녹색정의당 대변인이더라’라며 개인 신상 공개에 나섰다. 말 한마디에 행사의 주인공마저 물리적으로 진압하는 공권력의 잔혹함을 ‘특정 정당 소속’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특성으로 가린 것이다.

조금 멀리 가보면 세월호 참사 당시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단식한 유민 아빠 김영오 씨에게 수많은 언론이 사실인지 알 수도 없는 내밀한 사생활을 파헤쳐 ‘매정하고 이중적인 아빠’로 만든 바도 있다. 이런 기사들은 비판을 받아도 ‘정치적 의도’라는 일정한 방향성이 있었다. 국가대표 축구 선수들을 나락에 빠뜨린 언론 보도엔 그러한 의도나 방향성이라도 있을까? 그때그때 여론을 좇고 클릭수에 집착하는 지금의 언론은 ‘정치적 의도’ 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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