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 수난의 역사② 노태우 정부 방송개편과 방송인의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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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력 동원한 KBS 장악...방송 4사 노조의 연대 제작거부 투쟁

1990년 KBS 자주수호사원 비상총회.
1990년 4월에 있었던 KBS사원들의 제작거부사태는 대규모 경찰병력이 진압, 농성자들을 강제연행하는 최악의 국면까지 치달았다. ©e영상역사관

“촛불혁명은 우리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개혁이 좌초하고 다시 적폐세력이 득세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상상하기 싫은 파국이 예상된다. 그들이 강요한 ‘좌우 프레임’과 ‘종북 프레임’을 압도할 ‘평화와 상생’의 패러다임을 세우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할 때다.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적폐세력이 돌아오지 못하도록…”

2017년, 6월항쟁 30년과 언론운동 30년을 정리한 글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이명박·박근혜 시절의 공영방송 유린이 얼마나 끔찍했으면 ‘다시는’이란 말을 다섯 번이나 되풀이했을까. 그로부터 5년 남짓, ‘그들’이 돌아왔다. 그리고 ‘상상하기 싫은 파국’이 펼쳐지고 있다. 그 파국의 끝이 어디일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왜 이 지경이 됐는지는 굳이 따지고 싶지 않다. 속 시원한 처방을 내놓을 능력도 아직은 없다. 공영방송의 수난은 왜 끊이지 않는 걸까? 특히 ‘국가기간 공영방송’ KBS의 독립성은 왜 끊임없이 위협받는 것일까? 이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공영방송 수난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① KBS 시청료거부운동와 6월 항쟁 
  ② 노태우 정부의 방송구조개편과 방송인의 저항
  ③ 이명박 정부의 방송장악과 방송인들의 저항
  ④ 박근혜 정부와 촛불혁명, 그리고 방송
  ⑤ 에필로그 : 2023년, 방송은 어디로 갈 것인가

[PD저널=이채훈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전 MBC PD] 6월 항쟁의 큰 흐름과 함께 시작된 방송 민주화운동은 곧 노태우 정부의 반격에 부딪쳤다. 88년 서울올림픽 때문에 유화적 태도를 취하던 노태우 정부는 1989년에 들어서자 문익환·임수경의 방북을 계기로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방송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리력을 동원한 KBS 재장악, 그리고 방송구조개편이 이어졌다. 

KBS 장악과 방송구조 개편

1990년, 노태우 정부는 일단 KBS를 직접 장악하려 했다. 정부는 ‘법정수당 사건’을 빌미로 KBS의 첫 민선 사장인 서영훈을 퇴임시키고 5공 시절의 청와대 대변인 출신인 서기원을 새 사장에 임명했다. KBS 사원들은 서기원의 출근을 저지했고, 정부는 4월 12일 경찰 병력을 투입하여 117명의 사원들을 연행했다. 방송사를 군화발로 짓밟은 초유의 사태에 KBS 사원들은 제작거부 투쟁에 돌입하여 매일 KBS 본관 1층 ‘민주의 터’에서 농성을 이어갔다. 정부는 4월 30일 다시 경찰을 투입, 사원 333명을 추가로 연행했다. 

MBC 노동조합은 일주일 동안 제작거부 투쟁을 벌였다. 늘 상대사를 경쟁자로 인식해 온 방송인들이 이제 ‘공영방송 사수’라는 목표 아래 같은 배를 타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KBS 투쟁은 결국 21명의 구속자와 11명의 해직자를 낳고 5월 17일 종료됐다. 제작거부에 대해 무노동무임금 원칙이 처음 적용됐다. 그해 5월, KBS 사원들 중 단돈 ‘10원’의 월급을 받은 사람이 많았다. 의도적으로 굴욕을 주려고 계산한 금액이었다. 

정부는 그해 6월 14일 ‘방송구조개편 계획’을 발표했다. ‘민방 허용, KBS 기구 축소, 공보처 장관의 KBS 감독, 교육방송의 문교부 귀속, CBS와 PBC의 종교방송 50%이상 편성, 방송위원회의 심의·제재 권한 강화, 방송사장의 편성·인사권 보장’ 등의 내용이었다. “MBC의 위상에 관해서는 추후에 별도 검토한다”고 했다. ‘방송구조개편’은 상업방송 허용을 통한 방송노조 분할 지배, 그리고 경쟁 심화를 통한 노동통제의 의도를 담고 있었다. 진정한 공영방송으로 거듭나려는 방송인들의 의지를 꺾고 관제방송으로 되돌리려는 시도였다. KBS, MBC, CBS, PBS 등 방송4사 노조는 방송사상 최초의 연대제작거부 투쟁을 벌이며 강력히 저항했다. 그러나 방송관계법(방송법, 한국방송공사법, 방송광고공사법)은 7월 14일 국회 본회의에서 날치기 통과됐다.

1990년 4월 11일 KBS.
1990년 4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임명된 서기원 사장은 경찰을 동원해 사장실 진입에 성공했다.

1990년 10월 31일, 정부는 “건설업체 (주)태영을 새 민방의 지배주주로 선정한다”고 발표했다(정부는 ‘민영방송’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당시 노조는 “국민의 방송이 아니라 개인 기업이 소유하는 방송이라면 ‘사영 상업방송’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다음해 12월 SBS-TV의 개국으로 방송 인력의 대규모 이동이 이어졌다. 케이블 방송사와 외주제작사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기존 공영방송사는 자회사로 분할됐고, 비정규 인력이 대거 투입됐다. 방송 시장 개방으로 외국 자본의 국내 방송 유입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노태우 정권 기간에 미디어 생태계에 무한 경쟁 체제가 도입됐다. 
 

노태우 정부의 방송장악은 윤석열 정부에 비하면 ‘신사적’

기자·PD를 통제하는 방식이 다양화됐다. 아이템 선정, 구성, 내용, 멘트 하나까지 간부들이 체크하고(1990년대 중반, 언론사의 임원 및 중간간부들 중에는 자기검열이 체질화된 사람이 많았다), PD·기자에 대한 프로그램 배정(의식 있는 PD에게 요리 프로그램을 맡기고 보수적인 PD에게 시사 프로그램을 맡기는 경우) 및 인사 발령(열성 노조원을 스포츠부로 발령하는 경우 등)으로 저항을 원천봉쇄했다.

어떤 기자나 PD는 연수를 보내거나 한직으로 돌리고 어떤 사람은 반대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게 돌린다. 과중한 업무량과 노동 시간도 노동 통제의 한 형태다. 노태우 정부 시절 도입된 치밀한 노동통제 방식은 이명박 정권 시절 김재철·안광한·김장겸 체제의 MBC에서 가장 극악한 형태로 자행됐다.

노태우 정부는 ‘방송구조개편’을 준비하기 위해 1989년 방송위원회 산하에 방송제도연구위원회(이하 방제연)를 설치하고 약 11개월의 연구와 토론 끝에 ‘2000년 한국 방송의 좌표’라는 최종보고서를 내놓았다. 방송체제의 큰 틀을 짜기 위해 나름대로 치밀하게 준비한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역설적이지만 노태우 정권의 방송장악은 연구와 토론이라도 있었으니 윤석열 정부의 막무가내식 태도에 비하면 신사적으로 보일 지경이다. 검찰과 감사원을 동원해 방송을 탈탈 털고, 그래도 장악되지 않으면 아예 방송사를 망가뜨려 버리는 윤석열 정부의 막가파식 태도는 노태우 정부에 비해 무책임하고 훨씬 더 폭력적이다.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노태우 정권의 방송구조 개편은 꽤 시의적절해 보일 수 있다. 공산권 몰락과 신자유주의 확산이라는 세계적 흐름에 발맞추어 방송을 시장 경제 체제에 내맡겼기 때문이다. 이제 자본이 지배하는 무한경쟁이 본격적으로 한국 미디어 시장을 휩쓸기 시작했다.

MBC 노조의 50일 파업

1991년 9월 6일, 김중배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이제는 자본과의 싸움”이라고 선언한 뒤 손석춘 기자와 함께 동아일보를 떠났다. ‘김중배 선언’은 시대정신의 정곡을 찔렀지만, 기자·PD들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90년대, ‘방송민주화운동’에 뭔가 심각한 허점이 있다는 게 명백해졌다.

필자의 소논문 <방송민주화운동이란 무엇인가>(1989)는 방송민주화운동은 ‘프로그램을 통한 실천’이 생명이라고 주장했다. 방송을 통해 ‘시민 사회’의 영역을 넓히고 표현의 자유를 확대해야만 6월항쟁 ‘무임승차’의 빚을 갚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파업에 참여했던 기자·PD가 방송 현장으로 돌아가면 사용자 편이 되어 노동자를 매도하는 일이 자꾸 벌어졌다.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민주화에 기여하고 국민에게 보답하는 노조의 창립정신이 흐려진다면 국민의 지지를 스스로 버리는 일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런 조건에서 MBC 노조에 대한 물리적인 공격이 이어졌다. 1990년 9월 4일 방송할 예정이었던 ‘우루과이 라운드, 그래도 농촌을 포기할 수 없다’ 편이 최창봉 사장의 지시로 갑자기 불방됐고, 이에 항의하던 안성일 위원장과 김평호 사무국장이 잇따라 해고됐다.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 구타치사 사건 및 드라마 <땅> 폐지 사건과 맞물려 노조 집행부의 333일 철야농성이 벌어졌다.

학생들의 분신 항거가 이어졌다. 김지하의 조선일보 칼럼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박홍 서강대 총장의 “분신배후” 발언,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정원식 총리 밀가루사건…. 이렇게 저항은 잦아들었다. 1992년 가을, MBC 노조는 강철같은 단결로 50일 파업을 벌여 최창봉 사장을 몰아내고 해직자를 복직시켜 가까스로 생명을 유지했다. 

1992년 MBC 노조가 집회를 열고 있는 모습.
1992년 MBC 노조가 집회를 열고 있는 모습.©언론노조 MBC본부
1992년 10월 발행된 언론노보.
1992년 10월 발행된 언론노보.©언론노조 MBC본부

공영방송 노조는 정부의 물리적 공격을 그럭저럭 견뎌냈으나 ‘방송구조개편’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6월항쟁, 학생과 시민들은 피땀어린 희생으로 시민민주주의의 틀을 확보했지만, 그 내용을 채운 것은 자본의 탐욕과 질주였다. 시청자 운동을 조직화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졌고, 방송 윤리강령과 취재 준칙을 제정하고 촌지 사건을 단죄하는 등 자정운동도 일어났다. 정권과 자본의 공격은 집요했지만, 명실상부한 공영방송을 세우겠다는 방송인들의 의지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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