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 수난의 역사 ①시청료 거부운동과 6월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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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언론자유가 적힌 노조 깃발을 들고 민자당 규탄대회에 참가한 KBS노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PD저널=이채훈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전 MBC PD] 

“촛불혁명은 우리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개혁이 좌초하고 다시 적폐세력이 득세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상상하기 싫은 파국이 예상된다. 그들이 강요한 ‘좌우 프레임’과 ‘종북 프레임’을 압도할 ‘평화와 상생’의 패러다임을 세우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할 때다.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적폐세력이 돌아오지 못하도록…”

2017년, 6월항쟁 30년과 언론운동 30년을 정리한 글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이명박·박근혜 시절의 공영방송 유린이 얼마나 끔찍했으면 ‘다시는’이란 말을 다섯 번이나 되풀이했을까. 그로부터 5년 남짓, ‘그들’이 돌아왔다. 그리고 ‘상상하기 싫은 파국’이 펼쳐지고 있다. 그 파국의 끝이 어디일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왜 이 지경이 됐는지는 굳이 따지고 싶지 않다. 속 시원한 처방을 내놓을 능력도 아직은 없다. 공영방송의 수난은 왜 끊이지 않는 걸까? 특히 ‘국가기간 공영방송’ KBS의 독립성은 왜 끊임없이 위협받는 것일까? 이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공영방송 수난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목차
① KBS 시청료거부운동과 6월 항쟁
② 노태우 정부의 방송구조개편과 방송인들의 저항
③ 이명박 정부의 방송장악과 방송인들의 저항
④ 박근혜 정부와 촛불혁명, 그리고 방송
⑤ 에필로그 : 2023년, 방송은 어디로 갈 것인가

전두환의 나팔수 KBS와 MBC는 공영방송이 아니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1980~1987)엔 본래적 의미의 공영방송이 존재하지 않았다. 국민의 목소리는 방송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고, 독재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전하는 ‘땡전뉴스’가 판을 쳤다. 우리 PD들은 그의 치적을 찬양하는 특집과 대중의 탈정치를 유도하는 우민화 프로그램에 동원됐다. 이 시절의 KBS와 MBC는 ‘공공의 이익에 봉사하는 공영방송’이 아니라 ‘독재권력이 조종하는 관제방송’에 불과했다. 민망한 표현이지만 “KBS는 본처, MBC는 애첩‘이란 자조 섞인 농담이 오가던 시절이었다. 방송사 구성원들은 자발적인 저항을 꿈도 꾸지 못했다.

전두환 신군부의 방송장악에 대한 최초의 저항은 80년 5월 광주MBC 방화사건이었다. 공수부대가 광주시민들을 때려 죽이는 상황에서 진실을 전하는 언론이 하나도 없었다. 계엄당국의 검열과 보도지침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기자들이 제작거부를 벌였지만 이 역시 한 마디도 보도되지 않았다. TV뉴스는 ”광주에서 1명의 시민도 죽지 않았다“며 ”유언비어에 속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했고, 한편으로는 새롭게 떠오른 ’지도자‘ 전두환을 찬양하는 보도가 줄을 이었다. 분노한 광주 시민들은 5월 20일 광주MBC에 불을 질렀다.

전두환은 그해 말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이 됐고, 국민들은 분노를 삼키며 침묵해야 했다. 시청자를 철저히 외면하는 관제방송에 대한 분노는 속으로 들끓고 있었다.

1980년 5월20일 불에 탄 광주문화방송(MBC) ⓒ5·18기념재단

KBS 시청료 거부운동, 관제방송에 대한 저항권 행사
1985년 일어난 KBS 시청료 거부운동은 방송의 주인인 국민이 직접 참여한 기념비적 저항운동이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공영방송의 수난’이 아니라 ‘관제방송 거부운동’으로 보아야 한다. KBS시청료거부범국민운동본부는 “KBS TV를 보지 않습니다”란 스티커와 유인물을 100만장 이상 뿌렸고, 86년에는 야당인 신민당이 동참하여 범국민 운동으로 확산됐다. 집집마다 시청자와 징수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KBS 시청료는 여당인 민정당과 정부만 내라!“

”우리 집엔 TV가 없는데, 시청료를 왜 내야 하죠?“

”어용방송 보기 싫어서 TV수상기를 부숴버렸습니다.“

”지난달에 수상기를 없앴으니 이달부터 내지 않겠습니다.“

얼핏 보면 요즘 가가호호 벌어지기 시작한 실랑이와 비슷하지만, 성격은 정반대였다. 지금의 TV수신료 분리징수가 공영방송의 기반을 허무는 권력의 폭거인 반면 80년대 KBS 시청료 거부운동은 관제방송에 대한 시민들의 정당한 저항권 행사였다. 당시는 명칭도 ‘KBS 시청료’로, 1987년 제정된 방송법 64조가 규정한 공적 부담금 성격의 ‘TV수신료’와 달랐다.

국민들의 거센 저항에 당황한 정부는 KBS에 시청료 강제징수권을 부여했고, 시청료를 전기세, 수도세에 포함시켜서 납부를 강제했다. 한국전력이 징수를 대행하게 된 것이다. KBS 시청료 거부운동은 그 자체로 KBS에 변화를 가져오진 못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1987년 6월항쟁의 도도한 강물과 합쳐져서 결국 독재권력을 무너뜨렸다. 그해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낭독한 6.29 선언은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한편 언론자유의 보장을 약속했다.

KBS TV시청료거부 전국 YMCA 공동캠페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KBS TV시청료거부 전국 YMCA 공동캠페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6월항쟁으로 진정한 공영방송 출범, 수난의 역사 시작
7월에는 각 방송사에서 기자, PD들의 반성이 이어졌다. 강압에 의해서든 자의에 의해서든 독재권력의 유지 강화에 기여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한 과거를 반성하고 국민의 품으로 돌아갈 것을 다짐한 것이다. 기자들은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조작한 프로그램에 대해 사죄했고, 6월항쟁 때 성난 시민들이 던진 돌에 취재차가 박살 난 경험을 밝히며 눈물을 닦기도 했다. 나 또한 전두환의 한강개발 치적을 홍보하는 프로그램에 동원되어 ”반포 낚시터에서 물고기가 잡힌다“고 국민을 기만한 것을 고백하고 자아비판 한 기억이 난다.

이러한 방송인들의 다짐은 그해 9월 5일 한국PD연합회의 결성으로 이어졌고. 그해 12월 9일 MBC노동조합(언론노조 MBC본부의 전신에 해당되는 노동조합으로, 지금의 MBC노동조합과는 다르다) 결성을 신호탄으로 각 방송사 노동조합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당시 MBC노동조합이 내건 구호는 ”권력의 손에서 국민의 품으로!“였다, 권력에서 독립하여 공공의 이익에 복무하는 진정한 공영방송으로 거듭나자고 결의한 것이다. MBC노조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방송사 최초의 파업으로 청와대 대변인 출신인 황선필을 축출하고 방송문화진흥회를 탄생시켜 공영방송의 기틀을 마련했다. 공정방송을 위한 편성권, 편집권을 확보하는 한편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시청자 국민들과 호흡하는 방송으로 거듭나기 시작한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확대하고 군부 잔재를 청산하는 방송인의 노력은 KBS <광주는 말한다>, MBC <어머니의 노래> 등 5공 청산 특집으로 이어졌고,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금기를 깨고 과감히 방송하기 시작했다.

진정한 공영방송을 지향하는 방송인들의 노력이 시작되는 순간, 이를 무력화하고 방송을 다시 장악하려는 노태우 군부정권의 계획도 시동을 걸었다. 공영방송의 수난, 그 역사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계속)

610 민주항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6·10 민주항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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