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프게 한 '인생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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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프로그램 ④]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하고 한국PD연합회가 주관한 ‘PD 글쓰기 캠프’가 지난 7월 8일부터 11일까지 파주 출판단지 지지향에서 진행됐다. 자기 성찰과 프로그램 질적 향상을 위해 기획된 글쓰기 캠프에 참여한 PD들이 ‘내 인생의 프로그램’을 주제로 쓴 글을 차례로 싣는다. <편집자 주>   
2018년 방송된 MBC 드라마 '위대한 유혹자' 포스터.
2018년 방송된 MBC 드라마 '위대한 유혹자' 포스터.

[PD저널=강인 MBC PD] 그룹 퀸의 노래 <Love of my Life>는 제목부터 ‘내 인생의 사랑’을 외친다. 가장 달콤한 사랑을 뜻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것은 나를 아프게 하고 떠나버리는 사랑이기도 하다.  

Love of my life, you've hurt me.(내 일생의 사랑, 날 아프게 하네요.)

You've broken my heart, and now you leave me(내 심장을 부순 당신, 이제 날 떠나가는군요.)

과연 그렇다. ‘내 인생의 프로그램’은 나를 아프게 하고 떠나 버렸다. 특별하고 소중했던 그 프로그램은 행복과 즐거움보다 괴로움과 외로움을 더 많이 안겨주고 저만치 달아났다. 2018년 3월부터 5월까지 MBC에서 방송한 드라마 <위대한 유혹자>는 내가 처음 연출한 미니시리즈다. 열심히 준비했고, 현장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시청률로 확인한 성적은 시원치 않았다. 드라마의 중반쯤에는 매회 MBC 드라마의 최저 시청률을 갱신했다. 방송될 때마다 시청률에만 초점을 맞춘 자극적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파업이 끝난 후 회사가 완전히 정상화되지 못해서 11년 전의 드라마를 재방송한 직후였다. TV를 실시간으로 시청하지 않는 1020 세대를 타깃으로 한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이런 배경은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다. 누군가 나에게 이런 위로를 건넬 때, 나는 더 불편했다. 구차한 변명 대신 처절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같은 상황에서 더 재미있고 공감할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 수 있었고, 그랬다면 이렇게 아프지 않았을 거라고 자책했다.

하지만 자기 반성의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세상이 이미 나를 많이 혼내고 있었으므로. 시청률로 봐서는 어디에도 없을 것 같았던 시청자들이 인터넷 세계에서는 수많은 질책과 조롱의 악플로 빽빽히 게시판을 채우고 있었다. 

젊은 주역 배우들도 나만큼이나 실패와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새벽까지 찍고 다시 아침에 만나야 하는 우리에게는 대중의 사랑이 유일한 연료였다. 낮아지는 시청률 수치는 바닥이 드러난 연료탱크처럼 위태로웠다. 우리는 모두 우울했고, 현장은 점점 험악해졌다.

힘겨운 촬영을 마친 어느 날, 집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다 중간에 발이 멈췄다. 이제 한 층만 더 올라가면 되는데, 어서 올라가서 지친 몸을 누이고 두 시간 뒤 다시 출발하기 위해 잠시 눈이라도 붙여야 하는데, 무거운 다리가 도저히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그저 거기 서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드라마 PD의 첫걸음을 내딛은 지 벌써 10여년이 지났다. 2008년 11월 5일, MBC 최종 면접날 새벽, 나는 이런 출사표를 썼다. 

저는 이제 사람들을 울리는 PD가 되려고 합니다. 드라마이든 예능 프로그램이든 교양 프로그램이든, 궁극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그 목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말 좋은 프로그램은, 웃음을 주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게도 하며, 삶의 습성을 바꾸기도 합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위대한 유혹자>는 시청자를 울리는 대신 나만 혼자 울게 만들었다. 시청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대신 내 마음만 잔뜩 흔들고 끝났다. 드라마가 후반으로 치달을 무렵부터는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시점부터는 방송사고 없이 끝나기만 하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촬영하고, 편집하고, 방송을 냈다.

그렇게 끝난 지 어느덧 2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이 드라마는 내 마음 속 어딘가에서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상처가 아무는가 싶다가도 자료를 찾으러 간 편성부서에서, 해외 판매 부서에서, <위대한 유혹자>라는 항목을 발견할 때마다 다시 딱지가 떨어져 마음이 불안하게 출렁였다. 그 땐 그랬지, 하고 대범하게 웃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위대한 유혹자>는 ‘내 인생의 프로그램’이다. 상처든 영광이든, 여전히 나를 흔드는 현재진행형이므로.

처음 ‘내 인생의 프로그램’이라는 주제를 받았을 때, 나는 가능하면 <위대한 유혹자>가 아닌 다른 프로그램에 대해 쓰고 싶었다. 간신히 내려앉은 시간의 더께를, 이 편안한 가면을 벗겨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회사에 들어와서 처음 했던 프로그램, 하면서 가장 즐거웠던 프로그램, 가장 오래 했던 프로그램 등을 떠올리며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보았다.

<위대한 유혹자>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고 나서도 가능하면 프로그램의 제목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게 될지 모르지만, 나의 서툰 고백이 이 프로그램을 위해 함께 애써 주었던 누군가에게, 혹은 아주 적은 수이지만 이 드라마를 아끼며 좋아해준 누군가에게, 또 다른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선뜻 손이 나가지 않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변명이라 생각하고 용기를 냈다. 

내 인생의 프로그램, 내 평생의 사랑. 너는 언제까지나 내 인생의 프로그램이겠지만, 내 인생이 계속되듯 내 인생의 프로그램들도 더 늘어날 것이다. 일생의 무엇이라는 무거운 수식어 대신, 그저 매일 만날 수 있는 무언가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새 프로그램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 PD라는 근사한 타이틀을 달기 이전의 내가 간절히 꿈꾸던 대로, 사람들이 공감하는 이야기로 위로와 감동, 재미를 함께 느끼고 싶다.

이 글을 쓰는 것으로 이제는 <위대한 유혹자>에 마침표를 찍고 싶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으므로. 나의 사랑, 나의 실패. 언젠가 너의 이름을 부르며 웃을 수 있을 때까지. 잠시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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