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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3월 18일을 기념하고 기억해야 한다. 2005년 10월 제33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채택된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증진을 위한 협약”(이하 ‘문화다양성협약’)이 국제법으로서 효력을 갖게 되는 날이다. 문화다양성협약 제29조는 비준국가가 30개국에 이른 날로부터 3개월 후에 발효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12월 18일로 비준한 나라가 35개국이 되었으니 3개월 후면 바로 3월 18일이다.


문화다양성협약의 근간이 되는 철학은 다문화주의다. 문화와 문화 사이에는 우열이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문화는 그 나름대로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사실 이런 깨달음은 이미 오래 전에 공유된 것이었다.


문명과 야만, 두 가지 기준으로 삶과 문화의 수준을 재단하며, 야만의 문명화를 자신들의 사명으로 생각했던 기독교적 세계관, 혹은 서구중심주의의 오랜 횡포 끝에 도달한 반성이었다. 그러나 깨달음은 단지 깨달음에 그쳤고 우아하게 포장한 침략은, 노엄 촘스키의 지적대로, 1492년 이래 계속되었다.


그런 무질서와 폭력을 규율할 국제적 기준을 마련하고 실천적인 방향으로 진화해 온 결과가 문화다양성협약이다. 문화를 일반 상품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통상규범에 이의를 제기하며, 새로운 문화의 교류 원칙을 마련하자는 것이 취지였다. 그 핵심은 협약 제6조의 규정대로, 각 국가는 자국의 문화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문화주권’을 인정한 것이다.


문화다양성협약은 반대표를 던진 두 나라 미국과 이스라엘을 제외한 나머지 148개국의 찬성으로 채택되었다. 전지구적인 지지는 보편적인 설득력을 의미한다. 마쓰우라 고이치로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협약이 이렇게 빠르게 비준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듯이 각국의 후속조치도 빠르고 열정적이다.


우리나라는 그 주된 흐름에서 제외된다. 결국 찬성표를 던지긴 했지만 우리 정부는 처음부터 애매한 입장으로 일관했다. 세계를 자국의 시장으로 만들려는 미국이 협약의 채택을 훼방하고 반대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문화적 소수자이자 약자인 우리나라가 미국의 입장을 줄곧 대변했다는 것은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없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문화다양성협약의 발효를 며칠 남겨둔 지금까지도 비준 일정을 밝히지 않는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한미FTA와 문화다양성협약이 충돌할까 봐 유야무야 넘어가려 한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사실은 그 충돌 때문에 비준을 서둘러야 한다.


캐나다는 일찌감치 비준했고 미국과 협상할 때 문화다양성협약을 근거로 시청각 분야에서 많은 양보를 얻어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우리 정부는 차일피일 비준을 미루고 있다. ‘대책없이 퍼주려 한다’, ‘주권을 포기하려 한다’고 비난받아 마땅하다.


정부는 우리의 문화, 특히 영화는 이미 경쟁력이 있어서 개방이 곧 이익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려면 우리보다 앞섰다고 평가되는 일본의 대중문화가 미국에서 얼마나 경쟁력이 있는가를 통계로 먼저 보여주어야 한다. 문화의 경쟁력은 수준이 높은가, 혹은 낮은가만으로 가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망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당장 문화다양성협약을 비준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6조에 규정한 당사국의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자국의 특수한 상황과 필요성을 고려해, 그 영토 내에서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을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특수한 상황을 더 특수하게 함으로써 문화주권을 회복 불능 상태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한미FTA를 두고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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