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현미 (EBS PD)

 

주위 사람들이 넌 아직도 한참 어리다고 해주면 좋아서 큭큭거리며 정말 어린 줄 알고 철없이 굴고 있는 내가 대학생이던 몇 년 전, 한국영화가 잘 나가기 시작하고 씨네21 같은 영화주간지가 꽤 읽히던 때, 영화잡지 옆구리에 끼고서는 종로나 대학로의 극장들 찾아다니며 소일해야 웬만한 대학생인 듯한 기분이 들어 이 영화 저 영화 보러 다니던 좋은 날들이 있었다.

 

그보다 어렸을 때는 고등학생이었고 참하게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영어 수학 공부하느라 정신없었을 때여서 주어진 것 이외의 세계는 따로 없었고 좀 더 커서야 다른 것도 볼 틈이 생겼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경험한 영화라 하면 몇몇 대작 한국영화들이 흥행하며 영화가 대중적으로 소비되기 시작하고 강변역에 팔걸이가 위로 올라가는 커플석이 자랑거리인 멀티플렉스가 문을 열던 그 즈음. 그것과 더불어 다양한 영화에 대한 갈증이 폭발하고 구석구석에서 해소되던 그 때의 그 느낌, 그 분위기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 내 선배들이 봤던 영화, 경험했던 영화, 생각했던 영화와는 아마 많이 다른 것일 것이며 그래서 나는 왠지 항상 무지하고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최근에 PD가 되기 전에 우러러보던 영화 프로그램을 맡게 됐는데 확 달갑지도 않고 그렇다고 싫지는 않고 마음이 무겁기도 하며 살짝 좋기도 한 어정쩡한 나의 반응은 아마도 그런 무지하고 부끄러운 기분 탓이었던 것 같다.

 

내가 좋다고 느끼는 것,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 보여주고 싶은 것과 그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이 만나는 지점을 찾는 게 참 어렵다고 느껴졌다. 왠지 모르게 무언가 있어 보이는 어떤 것. 고급스럽고 우아한 그것을 망치고 있는 듯한 불길한 예감.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불길한 예감일수록 적중한다는 것. 새로운 곳,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서 이리 쿵 저리 쿵 박아대다보니 얼굴을 포장하고 있던 밑천은 다 드러나고 섣부르게 품었던 희망이나 바람같은 것들도 조금씩 사그라든다. 소심하게나마 확신하던 것도 맞는 건지 틀린 건지 헷갈리기 시작할 즈음이면 주위에서 자꾸만 묻는다. 이건 어떻게 할까요? 저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지만 스스로 무지함을 부끄러워하며 살아온 사람이 제대로 된 대답을 해줄 수 있을 리가 없다. 적당히 되는 대로 대답하며 순간순간을 모면할 수밖에. 더 많이 알았다고 해서, 더 경험이 많다고 해서, 더 자신감이 있다고 해서 일을 더 잘하는 것은 아닌 법(?). 그 어떤 PD도 어떤 생각을 확실히 정리해서 확신에 가득 차서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정신없이 나를 끌어당기고 사람들을 닦달하며 하루가 간다.

그런 불길한 예감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도 모른 채 프로그램은 벌써 3주째 방송을 탔다. 단순하고 가볍게 생각하기로 마음 굳게 먹은 PD는 왠지 조금씩 떨어지고 있는 듯한 직감에만 의지하며 3주째 방송을 마친 프로그램의 게시판 시청자 반응을 조심스레 보고 다음주 방송분을 만들기 위해 스태프들을 몰아친다. 열등감은 저 뒤에 꽁꽁 숨겨 놓을수록 좋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