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욱희의 내시경] 촬영 원본을 동료 PD에게 공개할 수 있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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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현재 SBS 스페셜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관심이 많습니다. 취재하면서 당연히 일반인들을 주로 만나게 됩니다. 많을 때는 60분 테잎으로 100권, 보통 70권 내외를 촬영합니다. 제가 취재한 테잎은 프리뷰어의 손을 거쳐 초 단위로 심지어 현장음 하나까지 모두 종이로 옮겨집니다.

저는 때로는 이 과정이 두렵습니다. 제가 어떻게 질문했는지, 어떻게 촬영했는지 그 속살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보다 밀도 높은 방송을 위해 당연한 과정이겠지만, 제가 취재한 그 많은 사연 중 극히 일부만이 방송됩니다. 취재하면서도 극적인 사연을 찾으려 노력하고 또 취재한 엄청난 분량의 이야기 중에서도 시청자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내용은 방송에 사용될 가능성이 높은게 사실입니다.

PD권력을 악용한 금품수수, 성상납 등은 논의 할 필요조차 없는 너무나도 당연한 직업윤리입니다. 오늘 제가 동료, 선후배 PD님들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진실추구와 관련한 언론인으로서 PD의 윤리에 관한것입니다.

최근 매체간 경쟁이 심해지면서 케이블 방송에서 제작하고 있는 교양의 형식을 빌린 일부 프로그램에는 적지 않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우연히 페이크 다큐라는 이름을 내건 케이블 프로그램을 본적이 있습니다.

모자이크와 음성변조... 방송내내 어느 부분에서도 이게 실제 상황인지 아니면 연기자에 의한 연출된 상황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제가 못 본 방송 초반부 혹은 방송 말미에 페이크 다큐라는 사실을 밝혔을지는 모를 일입니다만 밝혔다고 해도 방송사 피디인 저조차도 제대로 알아챌 수 없을 정도였을 겁니다. 그리고 페이크 다큐라는 사실을 밝혔다 하더라도 과연 일반 시청자들께서 페이크 다큐의 의미를 정확하게 분별해 낼 수 있을런지 의문입니다.

이런 문제는 비단 제작 여건이 상대적으로 열악할 수밖에 없는 케이블 방송 쪽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SBS에서도 얼마 전 비록 외주 제작 프로그램이었습니다만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제작윤리와 관련해 문제의 소지가 있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지상파 방송사에서도 일반 출연자 방송 사연의 진실성과 관련한 문제로 외주제작사와 프로그램 연출자가 징계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방송통신 융합시대 시장주의의 원리는 방송산업 종사자들을 무한 경쟁상황으로 내몰고 있는게 사실입니다. 아무리 좋은 가치를 담고 있어도 시청자에게 선택받지 못한다면 즉, 시청률이 높지 못하면 제작자는 그 결과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연출자 및 제작진은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팔지도 모르는 치명적인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저 역시 그런 유혹을 경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IMF로 취업문이 완전히 얼어붙었던 시절, 취업을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하고 있는 여대생의 사연을 취재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섭외의 이상적 목표는 예쁘고 개성있고... 이른바 방송적 매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너무나 잘 아시겠지만 그런 일반출연자가 쉽게 섭외될 리가 없었습니다.

방송 날짜는 다가오고, 섭외는 안되고... 그러던 어느 날 저와 함께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던 스텦 중 한명이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한국예술 등에 연락해서 아직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연예계 진출을 꿈꾸는 여대생을 섭외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얼마나 프로그램을 잘 만들고 싶었으면 그런 생각까지 했었겠습니까.

그 때도 아마 지금처럼 황사 바람이 불던 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가 바람부는 여의도 광장에서 나에게 한 말이 생각납니다. “어차피 그 사람들은 일반인이고, 취업을 준비하는게 사실 아니냐...비록 연기자 학원에 다니고 있지만 그게 심각한 문제는 아닐 수 있는거 아니냐...”

약간의 논쟁이 있었고, 다행히 그런 계획은 없었던 일로 하기로 하였습니다만, 그 당시 그런 고민까지 해야만 하는 상황이 가슴 아팠었습니다.
최근에는 예능 프로그램에도 교양적 요소가 많이 가미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교양국 PD였던 우리들조차 그런 유혹에 빠진 적이 있었음을 고백하면서 과연 리얼리티를 표방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시는 여러 PD들께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떤 기준을 지니고 계신지 스스로 한번쯤 질문해 보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SBS에는 윤리 강령이 있습니다. 아마 KBS와 MBC에도 비슷한 것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연초 회사에서 윤리강령을 준수하겠다는 서약서를 써 내라고 했을 때 또 그렇고 그런 형식적인, 다분히 선언적인 내용들이겠지 하고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언론자유와 프라이버시 보호와 관련해서 발표를 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관련 자료를 뒤져보다가 그 동안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던 SBS 윤리 강령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민방 SBS에 대한 다소간의 편견도 있을 수 있기에 오히려 더 엄격하고 또 제작현장의 실제적인 고뇌가 느껴지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여기에 그 일부를 인용해 볼까 합니다.

 ‘SBS 방송저널리즘의 구현과정에서 진실추구와 정확성을 우선가치로 둔다’ ‘제작 편의를 위해 이분법적인 양극단의 주장만를 포함시키는 제작관행을 탈피하도록 노력한다’
‘일반인은 물론 범죄 피의자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수 있는 취재방식을 지양하고 사생활과 관련된 내용은 최대한 보호한다’


귀하들께서는 귀하가 촬영한 원본 테잎을 동료 피디들에게 다 공개할 수 있으신지요. 저는 나름대로 원칙을 지키려 노력한다고 자위는 하지만 솔직히 자신은 없습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한번 쯤 여러분 회사의 윤리강령을 차분히 읽어 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조욱희 / PD


 91년 SBS 편성팀 편성PD 입사해 <생방송 행복찾기>,  <생방송 모닝와이드>,  <사람만이 희망이다>,  <토요일은 즐거워>, <그것이 알고 싶다> 등을 연출해 왔다. 조 PD는 지난해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사형제 폐지와 관련한 프로그램을 제작해 제9회 엠네스티 언론상을 수상했다. 현재 을 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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