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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에서 5월 말에 방영하기로 했던 김종학프로덕션의 ‘태왕사신기’가 또 다시 연기되었다. 애초 3월 방영 예정이던 것이 몇 차례 늦춰진 탓인지 소식을 접한 사람들의 시선 또한 차갑다. MBC노조는 ‘대국민사기극’이라고 질타했다. MBC는 올해 드라마 라인업에서 아예 ‘태왕사신기’를 지워버렸다.

김종학 PD는 각 장면마다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보니 종종 납기(?)를 맞추지 못하는 일이 그에게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국민들은 그가 만든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등의 대작들을 보면서 그것조차 산고로 이해했다.

그러나 방영일자를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프로의 세계에서는 치명적이다. 무엇보다도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렸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계약을 제때에 이행하지 못함으로써 방송사의 신뢰도를 손상시킨다. 뿐만이 아니다. 방송사는 대체 프로그램을 긴급하게 제작해야 한다.

그렇게 만든 프로그램이 제대로 정성을 다한 것일 수는 없다. 시청자들은 비용을 지불하고도 양질의 콘텐츠를 즐길 권리를 박탈당한다. 또 하나, 배용준의 말을 빌리긴 했지만 스스로를 ‘마지막 한류의 자존심’이라고 여기는 그의 말 속에 ‘더 나은 작품을 선사하기 위해’ 방영이 연기되는 동안 소위 ‘땜빵’해야 하는 동료 PD들에 대한 미안함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오만한 엘리트 의식 속에 시청자에 대한 사죄의 마음인들 진정이었을까?

한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자. 영광은 자기와 같이 일한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책임은 자기가 져야 하는 게 PD의 숙명이다. 그런데 그는 사태의 구체적인 원인이 대본의 문제였다고 함으로써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렸다. 김종학답지 않았다. 그렇게 말한다고 자기의 책임이 면해지거나 감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제작자나 PD는 기본적으로 제작의 전 과정에 대해 관여하고 책임을 진다. 부실한 대본으로 촬영을 시작했다면, 그것도 16부작, 전 공정의 65%가 지난 다음에야 문제를 깨달았다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렇다고 비난을 김종학 PD에게만 집중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당대의 스타 PD가 초라한 모습으로 해명 기자회견을 갖는 것, 그것은 김종학을 둘러싼 풍경만은 아니다. 아마도 더 초라한 스타들을 우리는 이제부터 숱하게 목도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방송영상산업이 벤처기업과 닮았고, 한류가 벤처 붐과 닮았다는 것, 그래서 머지않아 한꺼번에 폭삭 주저앉아 버릴 것이라는 경고는 한류 붐에 흥분한 이들에게는 기분 나쁜 저주였을지 모른다.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예언이 아니라, 이미 현실이다.

지금의 영상산업은 더 이상 문화산업이 아니다. 문화라면 위장문화일 뿐이다. 기형적인 위장문화사업이 등장한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무분별한 외주정책이다. 외주정책이 만들어 낸 것은 내실있는 요소시장, 건전한 경쟁논리가 아니라 철학 없는 시장이었다. 철학이 없는 시장에 우후죽순 점포를 차린 드라마제작사들이 관심을 가지는 건 오로지 돈이다. 외형만 잔뜩 키워 팔아치워 버리는 상술이 판치는 한 ‘문화’가 설 자리는 없다.

정책결정자들의 천박함이 그런 환경을 만들었다고 문화의 퇴화를 막을 방법은 전혀 없는 것인가? 방송사가 그 역할을 맡았어야 했다. 그러나 방송사들은 서로 경쟁함으로써 시장의 타락을 더 부추겼다. MBC노조가 MBC 경영진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것은 정확한 지적이다.

김종학을 보는 우리의 절망이 그의 사명감과 꿈이 너무 컸기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가 철학 없는 시장에 몸을 망쳤다는 것이고, 방송사 또한 그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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