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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범 전국언론노동조합 교육선전실 차장

“사실 그대로, 있는 그대로 보도하자!” 지난 11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 앞에서 언론노동자들의 외침이다. 김보협 언론노조 한겨레 지부장은 언론이 명백한 사실 자체도 논란과 공방으로 보도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그의 표현은 빌리면 ‘노랗게 물든 단풍에 대해 ‘노랗다’ 대 ‘파랗다’식의 진위 공방으로 보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사건은 그런 식으로 구성된다. 사실의 조각들이 기자의 시각과 뉴스룸의 판단으로 맞춰지며 실체적 진실에 주력할 것인가 거리두기나 면피용으로 접근할 것인가가 결정이 난다. 그 내용을 독자들과 시청자들이 접하고 판단하게 된다. 그리고 여론이 만들어 진다.

11월11일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와 민중대회에 대해 정부는 ‘불법 집회’로  몰아세웠다. 헌법에 명시된 집회시위의 자유를 막은 것이다. 또한 지역에서 올라오는 버스를 타고 오는 농민들을 강제로 막아 세웠다. 국민들의 발과 목소리를 꽁꽁 묶어놓은 것이다.

대부분의 언론 역시 똑같은 일을 저질렀다. 이들은 국민이 왜 거리에 나서게 됐는지에 대한 고민과 문제제기보다는 교통마비와 불법집회에 따른 엄단을 요구하는 선택을 했다. “사실 그대로, 있는 그대로 보도하자”라는 아픈 지적에 언론사들은 ‘더 아픈 보도’를 내보낸 꼴이다.

한 신문만 살펴보면 1면 <휴일 도심 시위… 교통 몸살>이란 제목으로 사진이 싣고 10면 역시 <‘불법 시위’로 시민들 발 묶여>라는 기사를 통해 집회 소식을 전하면서 ‘주말 나들이 나온 시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는 것도 빠트리지 않았다.

11일 방송 3사는 저녁 메인뉴스에서 <도심 곳곳 충돌>, <상경 시위대 충돌>(KBS 4~5번째), <충돌…도심 마비>(MBC 6번째), <곳곳 충돌> <“비정규직 해결하라”>(SBS 3~4번째)
는 제목을 달고 이날 집회 소식을 전했다. 이번 집회의 이유를 제기한 제목으로 보도한 것은 미약하지만 SBS 뿐이다.

KBS는 불법집회에 대한 방송사의 입장을 전하기보다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의 입을 빌려 “불법시위가 아니다”라는 의견을 구했다. ‘노랗다’, ‘파랗다’를 확인하기 위해 다른 노동현안의 문제를 제쳐 놓고 이 발언을 선택했다. 그리고 ‘휴일 도심의 마비 상황’ ‘모처럼의 휴일이 얼룩졌다’는 내용의 사실 조각들도 포함시켰지만, 이날 행사에서 연설한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의 주요 발언은 빠트렸다.

이날 방송사들의 보도 중에는 이유와 함께 또 하나 놓친 것이 있다. 충돌 뒤에 발생한 부상자들에 대한 보도다. 전경이 쓰러진 시민을 향해 곤봉을 휘두르는 영상을 내보냈지만, 그가 얼마나 다쳤는지에 대한 내용은 찾기 힘들다.

적어도 과거에는 집회 다음 날 시위 진압의 문제점 등을 진단하는 기사들이 나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언론사들이 대선 정국과 삼성 비자금 문제로 잠시 사안을 미뤄 놓은 것으로 보인다. 오는 12월 1일 똑같은 충돌이 발생한 후 ‘사실’을 모아 내보낼 계획을 세워놓았는지도 모른다.

집회가 끝나고 교통의 흐름은 원활하게 됐지만, 다친 사람들과 집회의 이유인 ‘왜’는 여전히 사회적 문제로 남아있다. 항상 공공성을 수식어로 달고 마이크를 쥔 언론이 답해야 할 사안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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