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다시 “뿌린 대로 거둔다”

|contsmark0|박수근 화백의 전시회를 다녀 왔습니다. 식민지와 전쟁의 참화로 뒤덮였던 1950년대, 적빈(赤貧)의 이 땅을 따뜻한 필치로 그려냈던 박수근 화백. 화강암 빛깔을 닮은 두꺼운 덧칠 바탕에 여인과 아이들, 노인과 나목(裸木)을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견해로 정겨우면서도 애잔하게 담아냈던 박수근 화백. 그래서 우리는 이중섭과는 또다른 의미로 그를 기리고 있습니다. 살아 생전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다가 죽어서야 그의 작품이 고액을 호가하자 그것이 너무 분해서 그를 주인공으로 작가 박완서는 소설 ‘나목’을 썼다고 하던가요. 박수근 화백을 만나고 온 날, 그 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tv를 켰습니다. 방송은 이미 우리의 생활이고 일상이지 않겠습니까, 틀면 나오는 수도물처럼 말입니다. 코미디, 드라마, 뉴스, 다큐멘터리…. 그 날도 어김없이 순서에 입각해서 온갖 휘황찬란한 프로그램들이 차례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아무 생각없이 이를 바라보다 문득 엄습하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통이기도 했습니다. 저렇게 저마다 잘난 프로그램 중에서 과연 10년이 지나고 50년이 지나서 대중속에 기억될 작품이 얼마나 있을까 하구요.무릇 ‘시간의 마모성’을 뛰어넘는 것은 모든 예술가의 꿈일 것입니다. 우리 프로듀서들도 자신의 프로그램을 작품이라 감히 말하며 제 프로그램에 작품번호를 매기기도 합니다. 때로는 누구 못지 않게 예술가연(然)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무시로 많은 프로그램이 쏟아지는 가운데 시공을 초월하는 작품의 생명력을 꿈꾸어 본적이 한번쯤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방송사에 길이 빛나는 주옥같은 명작’ 말입니다. 과연 그런 작품이 얼마나 있습니까?하지만 혼과 신명을 다한 예술가의 작품과 다분히 일상적 노동의 산물인 방송프로그램은 같지 않다고 말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제작일정과 제작비에 쫓기며, 각종 제작요소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면서 더더욱 시대상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방송사의 조직 논리에 복무하며 시장에 아부할 수밖에 없는 방송 프로듀서가 어찌 예술가일 수 있냐고 항변할 수도 있겠습니다.결국 그런 것인가요. 우리들은 그저 월급쟁이며 장사꾼이며 붕어빵 공장 기계입니까. 시간을 뛰어넘기는커녕 어떻게든 시속에 영합하고 편승하면서 그렇게 소모되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심지어는 자신의 프로그램을 자기 자녀들과 함께 보지 못할 정도의 자괴감 속에서 자존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 pd들의 실상인 것입니까.필자는 지난 1년간 본란을 통하여 우리 방송의 왜곡을 끊임없이 질타해 왔습니다. 특히 방송을 그 도구적 유용성 측면에서만 바라보면서 방송과 방송인을 동원하려는 정치권력과 자본의 음모에 대해 강한 비난을 했습니다. 권위주의 시절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정권의 방송 장악과 유린 - 방송독립을 공약하고도 이를 식언하고 마침내 노정합의의 뒤통수를 쳐서 방송노조 간부를 구속하는 등의 안면몰수를 자행하는 - 에 대해 비판하고 때로는 격정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정권이 정략적 음모로써 방송을 대하고 자본이 시장논리로만 호시탐탐 방송계를 노리고 있는 동안 방송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를 극복할 만한 토대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방향감각을 상실했고 화면에는 현실도피를 조장하는 국적불명의 프로그램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직도 권력의 눈치를 보는 기회주의적 보도가 국민의 알 권리를 우롱하고 있습니다. 반면 제작현장의 황폐화는 가중돼 격무의 후유증으로 현업 프로듀서가 ‘순직’하는가 하면 악화일로의 경쟁 풍토에서 일부 인기 스타에 대한 과도한 의존으로 프로그램은 표류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문제의식을 가진 일부 프로듀서에 의해 프로그램을 통한 실천적 노력이 시도되고 있지만 성과는 미지수입니다.지난 1년 필자는 우리 방송을 둘러싼 이러한 파행의 외인(外因)을 지적하고 그들을 규탄하는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했던 것으로 반추합니다. 실제로 통합방송법 문제가 화두였던 점에서 그것은 얼마간 필요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인정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제도는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아니 오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당면한 초미의 과제인 통합방송법 통과가 덜 중요하다거나 시급하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들 프로듀서가 작가정신을 포기한 채 나쁜 것은 다 구조와 제도의 탓으로 돌리고 ‘피해자’를 자처해서는 달라질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박수근 화백 시절에 법이 좋아서 제도가 완벽해서 또는 제작여건이 좋아서 그런 작품이 그려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제작 환경에 매몰되고 조직 논리에 복속돼 그저 파편화된 상태에서 세상과 이웃과 담을 쌓고타성적으로 프로그램을 만들 때에 프로듀서는 결코 시간의 마모성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맹목적으로 답습될 경우 프로듀서의 사회적 위상이나 지위도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다시 문제는 프로그램이며 세상은 뿌린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본보 발행인>|contsmark1|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