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上] 아름다운 민족주의, 조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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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이후 최대의 언론탄압 사건으로 평가되는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에 대한 ‘사법살인’사건이 지난 16일 법원의 재심을 통해 진실이 확인됐다.

민족일보 사건은 2000년 10월 방송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민족일보와 조용수’ 편(연출 김환균 PD)에 잘 나타나 있다. 이에〈PD저널〉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후기를 엮은 <우리들의 현대침묵사>에 실린 ‘아름다운 민족주의 조용수’ 편을 저자의 동의를 얻어 두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1)사형 집행

  1961년 12월 21일, 날이 흐렸다. 간간이 눈발이 뿌렸고, 터진 구름 사이로 해가 잠깐 비치는가 하면 어느 새 매운 북서풍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영하 2도, 겨울치고 그리 낮은 기온은 아니었지만 바람 탓에 체감 온도는 영하 10도는 족히 됨직했다.

  그 날치 경향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오전 혁명재판에서 사형이 확정된 5명의 ‘사형판결을 확인’했다. 이 ‘사형판결 확인’이라는 이상한 표현은 사형집행 명령을 내렸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그 날 하루의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기안부처가 표기되어 있지 않은, 그러나 법무부에서 기안한 것이 분명한 문서번호  ‘12-452’의 기안문서는 ‘사형집행명령’을 내려달라는 소청이 담겨 있다. 당시 정부기관의 주요 문서들이 타자와 수기로 작성되었던 것에 반해 흘려 쓴 글씨로 급히 작성된 이 기안문서는 담당국장, 김영천(金永千) 법무부 차관을 거쳐, 법무부 장관에게 상신되었다. 고원증(高元增) 장관이 최종 결재한 것은 12시 정각. 그의 서명은 호쾌해서 다음 칸까지 차지했다.

▲ 민족일보 故 조용수 사장

   “단기 4294년 12월 2일 혁명검 제 298, 299, 300, 301, 302호로 혁명검찰부 검찰부장이 구신한 상기 사형수는 판결대로 사형집행을 명령함. - 단기 4294년 12월 21일, 법무부장관”

   사형수는 모두 다섯 명이었다.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 위반 곽영주(郭永周), 최인규(崔仁圭),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7조 위반 임화수(林和秀), 같은 법률 제6조 위반 최백근(崔百根), 그리고 조용수(趙鏞壽).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장관이 결재한 지 불과 2시간만인 오후 2시부터 사형이 집행되었다. 곽영주, 최인규, 최백근, 임화수, 조용수의 순이었다.

  당시 혁신계에 몸담았다는 이유로 용공분자로 몰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던 허영무씨는 그날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간부들이 밖을 내다보지 말라고 얼러댔지만 그래도 감방의 창을 통해 뒷모습을 바라보았죠. 마지막 길을 가는 동지의 뒷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송남헌 선생도 그날을 잊지 못했다.
  “정치깡패 임화수는 안 들어가려고 발버둥쳤어요. 하지만 조용수는 조용히 걸어들어가 처형당했어요.”
  다음 날 서울형무소장은 법무부장관에게 ‘사형집행전말’을 보고했다.

   “곽영주, 당37년 … 4294년 12월 21일 14시 1분 착수, 14시 14분 종료
   최인규, 당41년 … 4294년 12월 21일 14시 41분 착수, 14시 52분 종료
   최백근, 당48년 … 4294년 12월 21일, 15시 11분 착수, 15시 21분 종료
   임화수, 당41년 … 4294년 12월 21일 15시 37분 착수, 15시 47분 종료”
  그리고
  “조용수, 당32년 … 4294년 12월 21일 16시 6분 착수, 16시 24분 종료”

   5명 중 가장 젊은 32살의 조용수, 억울한 죽음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어서 모질게 버틴 것인지, 가장 긴 18분이 걸렸다. 일설에 의하면 죽은 줄 알고 줄을 풀었으나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아 다시 매달았다고도 한다.

  조용수의 시신은 이튿날에야 시구문을 통해서 동생 조용준씨에게 인계되었다. 연로하셔서 병중이신 아버지께는 알리지 않은 채였다. 조용준씨는 날씨때문인지 두려움때문인지 몸을 덜덜 떨면서 형님의 시신을 건네받았다.

  “그 며칠 전에 형님을 면회했는데 차분했어요. 그 전에는 간혹 초조하고 불안한 기색도 보였었는데 그날은 평정심을 되찾은 것 같더라구요. 오히려 아버님을 걱정했지요. 형님의 차분한 표정을 보고 저는 ‘아, 사형은 안 당하겠구나’ 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죽음을 이미 받아들이기로 하셨던 것 같아요.”

  32살의 젊디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조용수. 그의 짧은 생은 어느 불길보다도 뜨겁고 찬란한 불꽃이었다. 그 불꽃은 그가 사장으로 재직했던 ‘민족일보’를 풀무삼아 타올랐다.

▲ 재판장으로 들어가는 모습. ⓒMBC

  (2) 민족일보, 가판 1위의 신문

  1960년 4월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다. 이 대통령의 하야는 억압의 시대, 특히 반공 이데올로기의 가장 강경한 표현인 ‘북진통일론’의 종언을 의미했다. 뒤를 이어 들어선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은 오랫동안 억압되어 왔던 언론의 자유를 최대한 허용해 주었다. 누구든 자금이 있으면 자유롭게 신문을 만들 수 있었다. 새롭게 선을 보인 신문이 무려 380여 개나 되었다. 억눌렸던 통일 논의는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통일론의 백화제방이었다. 민족일보도 그런 자유의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신문이었다.

  1961년 2월 13일에 창간된 민족일보는 다른 신문과는 구별되는 사시를 신문의 제호 왼쪽에 실었다. ‘민족의 진로 제시, 부정부패 고발, 근로 대중의 권익 옹호, 양단된 조국의 통일을 절규한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민족일보 논설 작성용 원고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고지(稿紙)엔 계도성 높은 민족일보의 논설만을 쓴다.”

  젊은 조용수 사장은 창간을 앞둔 1961년 1월 19일 발표한 ‘민족일보 창간에 즈음하여’라는 글을 통해 민족일보의 성격을 “국토의 양단, 민족의 사상적 분열, 생활의 도탄, 사회악의 창궐을 광정(匡正)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전 민족의 비원인 통일 문제는 민족일보가 가장 열렬히 정력을 바치려는 대상이 될 것”이라며 “민족간 유혈전쟁을 고취하고 평화적 통일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가장 준엄한 비판자가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승만 시절,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는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민족’을 말하는 자들은 공산주의라도 민족이라면 함께할 수 있다고 선동하는 위험한 자들이었다. 그처럼 ‘민족’이라는 단어는 오랫동안 금지된, 적어도 불온한 냄새를 풍기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민족일보 제호와 사시의 첫 머리에 ‘민족’이라는 단어를 당당하게 쓴 것이다. 진보적 지식인들은 감격이나 흥분을 넘어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억압적인 이승만 정부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청년 강태운씨는 이렇게 말했다.

  “민족일보, 민족일보… 저는 그 제호를 보고 아찔했어요. 오랫동안 써서는 안 되는 말이 거기에 떡 들어가 있으니… 그 아찔한 기분은 뭐라고 말을 못해요.”

  민족일보는 그 정신적 뿌리를 ‘독립정신’에서 찾았다. 창간호부터 1면에 실려 연재된 ‘광야의 소리’는 노(老) 독립운동가들을 찾아다니며 민족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방담기사였다.

  당시 민족일보 기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조용수 사장은 평생을 조국의 독립운동에 바친 독립운동가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불우한 노년을 보내는 것에 대해 몹시 안타까워했다. 담당기자들이 그들을 찾아갈 때면 늘 쌀가마나 돈 봉투를 건네주곤 했다.

  소외 계층은 언제나 소외 당하기 마련이다. 4 · 19가 가져다 준 자유의 공간에서조차 빈민들의 삶은 지긋지긋한 보릿고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 해 삼남 지방에 몰아닥친 가뭄은 농민들의 깊어가는 주름을 쩍쩍 갈라진 논밭에 그려놓았다. 민족일보는 특별취재반을 구성해 농촌의 비참한 생활상을 있는 그대로 전하도록 했다. 서울에서 정치인이나 기업가들을 주로 대하던 기자들에게는 농촌의 현실 자체가 충격이었다.

  “당시 특별취재반의 일원으로 삼남지방을 취재했습니다. 진주 근처 한 농촌 마을을 갔는데, 마을의 어느 집 하나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 거예요. 끼니때가 되었는데도 말이죠.”(김자동, 당시 민족일보 특별취재반)

  민족일보의 소외 계층에 대한 관심과 진보적 논조는 사람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나름대로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모두 민족일보를 읽었다. 뿐만 아니라 빈민 계층에서도 정기 구독자가 생겼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민족일보는 창간 한 달만에 발행 부수 3만 5천 부를 기록했다. 동아일보 등 당시 유력지들이 5만 부를 발행했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가두 판매에서는 쟁쟁한 유력지들을 제치고 1위를 기록했다.

  “참 신났지요. 하루 종일 뛰어다녀도 피곤한 줄 몰랐으니까요. 민족일보 외에 다른 신문에서도 일해 보았지만, 기자로서 그렇게 뿌듯한 적은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어요. 민족일보의 기자라는 게 정말 자랑스러웠습니다.”(전무배, 당시 민족일보 기자)

   (3)우익 학생

  조용수는 1930년 4월 24일 경상남도 진양군 대곡면에서 유복한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의 작은 아버지 조경규는 대구신보와 시사신보 사장을 지내고 2대, 3대, 4대 국회의원으로 자유당 원내총무를 두 번이나 지냈다. 외삼촌인 하만복도 과도정부 입법의원, 반민특위 위원, 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집안의 내력으로 보아도 짐작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익적인 집안 분위기가 어린 조용수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최초로 이념적인 문제에 부딪친 것은 중학교 시절이었다. 진주중학교에 다닐 때, 우익 학생 간부로 활동하다가 좌익 학생들과 마찰을 빚었다. 그것이 대구 대륜중학교로 전학하게 된 이유였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대륜중학교 동기이다.

  “조용수는 대륜중학 5, 6학년 때 같은 반이었어요.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에도 같이 들어갔지요. 조용하고 내성적인 편이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조용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明治)대 정경학부에 편입했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그는 재일거류민단의 기관지인 ‘민주신문’과 교포신문인 ‘국제타임스’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언론인의 길을 닦았다.

  1956년 북한과 총련이 재일교포 북송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자 조용수는 청년 단원들을 이끌고 적극적인 저지운동을 벌였다. 북송 재일교포를 싣고 가는 열차를 막기 위해 철로를 베고 눕기까지 했다. 그가 청년들을 이끌고 북송선이 떠나는 항구에서 일경에게 격렬하게 항의하는 장면은 영화관에서 상영되었던 대한뉴스에까지 소개되었다.

    (4) 혁신의 꿈

▲  재판장에서 진술하고 있는 故 조용수 사장 ⓒMBC

  조용수에게 1959년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한 해이기도 했다. 진보당 당수 죽산(竹山) 조봉암이 간첩으로 몰려 사형 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그는 조봉암의 구명운동에 적극 나섰다. 이 무렵 그는 그의 운명을 바꿔 놓을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죽산 조봉암의 비서를 지냈던 이영근(李榮根)이었다.

  이영근은 당시 동포들을 상대로 주간 ‘통일조선신문’(후에 ‘통일일보’)을 발행하며 반이승만 운동과 함께 평화적 통일 운동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었다. 그의 평화통일론은 조용수로 하여금 조국의 분단 문제를 근본에서부터 돌이켜보게 했다. 열성적인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조봉암의 사형을 집행했고 민단에서는 조용수를 시골로 좌천시켰다. 그곳에서 접하는 조국의 소식은 암울하기만 했다.

  이승만 정부의 말기적 증상은 더욱 심해갔고 평화적 통일은커녕 남쪽의 민주주의조차 고사해 가는 중이었다. 1960년 3월 15일에 치러진 선거는 공공연하고 노골적인 부정으로 얼룩졌다.

  혹심한 겨울 추위는 봄의 시작이기도 하고, 절벽으로 가로막힌 막다른 길이 때로는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부정선거는 전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김주열 학생의 참혹한 시신은 항거의 물결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다. 거대한 파도는 경무대까지 덮쳐 이승만 대통령은 마침내 하야한다. 

  ‘제2의 해방’. 사람들은 4월 혁명이 가져온 자유의 분위기를 이렇게 불렀다. 새 시대에 대한 열망 속에 진보당 사건으로 붕괴되었던 혁신계도 새로 조직을 정비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조용수도 국내로 들어와 혁신 정당인 사회대중당 후보로 경북 청송에서 출마했다. 혁신계는 선거운동 기간 내내 돌풍을 일으켰지만 그 돌풍이 표를 몰아온 것은 아니었다. 3, 40석은 충분하리라는 기대는 무참하게 깨졌다. 정치신인 조용수도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혁신계 당선자는 고작 7명뿐이었다.  

  잠시 일본으로 돌아간 조용수는 가장 중요한 패배의 원인을 혁신계의 목소리가 일반 대중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당시 혁신계는 선거 패배에 대한 인책론으로 분열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는데 혁신계 통합을 위해서도 구심점이 필요했다. 혁신계를 통합하고 혁신계를 대변하기 위해서 조용수가 구상한 것은 신문의 창간이었다. 이영근도 사람들을 소개하고 자금조달에 힘을 써주는 등 여러 모로 도움을 주었다. 

  다시 귀국한 조용수는 신문 창간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무렵 조용수에게 조언한 사람 중 하나인 박진목씨의 말에 따르면 처음 논의되었던 제호는 ‘대중일보’였다고 한다.

  “사장을 누구로 할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였지요. 처음에 조용수가 윤길중으로 하면 어떻겠냐고 묻더군요. 저는 윤길중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사장은 특정 정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 오히려 분열의 불씨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장은 정파와 무관한 인물이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었지요.”

  결국 사장은 32살의 젊은 조용수가 맡게 되었다. 조용수는 조동필, 이종률, 송지영, 이건호 등 당시 쟁쟁한 진보적 학자들로 필진을 꾸리고 1961년 2월 13일 ‘민족일보’를 창간했다. 자체 인쇄시설이 없었던 민족일보는 정부 기관지인 ‘서울신문’에서 인쇄를 했다.

 (5)민족과 자주의 외침

  민족일보의 창간은 이승만 이후 들어선 장면 정부의 언론의 자유를 중시하는 정책 덕분이었다. 하지만 장면 정부의 인내는 오래 가지 않았다. 장면 정부에 대한 기대 또한 그랬다.

  그 무렵 가장 커다란 현안은 ‘한미경제협정’이었다. 연 국민 소득 70 달러에 불과한 나라, 국가의 예산을 편성하려 해도 재원이 없었다. 미국의 경제 지원과 원조가 불가피했다. 장면 정부는 미국과 경제협정을 맺었지만, 협정 반대투쟁위원회가 결성되고 협정의 철회 운동이 벌어졌다. 협정의 조항 중 원조의 대가로 미국이 원조 사업을 감시, 감독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문제였다. 미국의 내정 간섭을 공식적으로 허용한 것은 주권국가로서 치욕이며 굴욕이라는 것이었다. 연일 협정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그것은 해방 이후 남한에서 벌어진 최초의 반미운동이었다.

  민족일보도 창간호부터 이 협정이 자주 경제를 해치는 부당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장면 정권이 미국에 예속적이라고 비판했다.

  부딪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반독재 투쟁으로 시작된 4월 혁명은 60년 가을부터는 통일운동으로 발전했다. 평화적인 방법에 의한 통일 방안들이 모색되었다. 당시의 통일론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고 통일협상의 파트너로 인정하자는 것, 둘째, 외세에 간섭받지 않고 우리 민족 스스로 자주적으로 통일한다는 것. 이는 이승만이 주창했던 북진통일론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면서 동시에 조봉암이 제시한 평화통일론의 복권이자 부활이었다.

  더 나아가 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미국만도 아니고 소련만도 아니라는 비소비미(非 蘇非美)노선이 모색되었다. 강대국의 입김에 예속되지 않아야 한다는 이른바 자주 · 중립화 통일론은 자유진영의 종주국으로 자부해 온 미국을 긴장시켰다. 중립화 통일론에 따르면 주한 미군은 철수해야만 했다. 미국으로서는 이러한 민족주의적인 움직임을 경계했다. 장면 정부를 압박했고 장면 정부는 그 압박에 굴복해 반공법과 데모규제법, 이른바 ‘2대 악법’을 제정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그러나 통일운동을 잠재우기는커녕 더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2대 악법 규탄대회가 잇따랐다. 조용수도 시청 앞 집회에서 대중연설을 하는 등 2대 악법 반대 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여러 사회 문제를 민족주의적인, 그리고 진보적인 시각으로 보도하는 민족일보에 대한 보복조치가 내려졌다. 3월 3, 4, 5일자 신문이 정간된 것이다. 민족일보의 인쇄를 담당하고 있던 서울신문에 정부가 압력을 가해 인쇄를 중지시킨 것이다. 민족일보는 ‘제2공화국의 첫 번째 언론자유 탄압’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보도하고 서울신문을 상대로 소송까지 제기했지만 결국은 인쇄소를 바꿔야 했다. 

   사실 민족일보와 정부 사이의 불편한 관계는 창간 전부터 싹트고 있었다. 민족일보 창간 준비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61년 1월 30일 민의원 본회의에서 여당인 민주당 김준섭 의원이 민족일보의 창간 자금이 조총련으로부터 들어온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민족일보 발기인 중 한 사람이면서 통일사회당 소속이었던 윤길중 의원이 ‘혁신계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빨갱이로 뒤집어 씌우는’ 행태이며 ‘음모’라고 일축했다.

  조용수도 일간지에 실은 의견 광고를 통해 ‘민족일보의 자금은 조련계의 것이 결코 아니’며, ‘재일교포들의 민족애에 불타는 깨끗한 성금’이라고 해명했다. 이 문제는 당시 치안국장이 조총련 관련설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고 발표함으로써 일단락됐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화로의 불씨처럼 잠복해 있었다. 나중에는 한 젊은이의 생명을 앗아갈 커다란 불길이 될 불씨로 말이다.

 

 김환균 MBC 시사교양국


 87년 MBC에 입사해 <인간시대>, 특집다큐멘터리 <체르노빌 그 후 10년>, <세계의 병원 5부작>을 거쳐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미국> 등을 연출했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기획을 맡았으며 20대 한국PD연합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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