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샘의 예술이야기] ⑳ 빌리 엘리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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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한샘의 예술이야기] ⑳ 빌리 엘리어트
  • 오한샘 EBS PD
  • 승인 2007.10.05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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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어린 시절의 꿈과 희망을 다룬 영화들을 접할 때면, 우리는 의례히 ‘성장영화’다, ‘청소년영화’다 해서 은근히 그 영화의 특성을 일방적으로 재단하고 카테고리 화하는 경향이 있다.
단지 청소년이 주인공이라는 이유만으로 소중한 이야기들을 놓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흔히들 영화가 종합예술이라고 불리는 연유가 있을 진데, 한때 그 시절을 겪어 보았다는 선입견만으로 필자마저도 작품속 내용을 쉽게 지나쳐 버리고 판단해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종종 들 때가 있다.

각각의 영화에 숨겨져 있는 다양한 보물들은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대충의 줄거리만으로 전체를 평가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북적이는 고기집에 어렵사리 자리 잡고 앉아서 연신 고기만 축내다 배 채우고 나가버리는 성급함이라고 할까?

필자의 경우 고기 맛을 제대로 즐기려면, 고기 자체의 육질도 중요하지만 우선 화로 변에 정갈하게 듬뿍 차려놓은 밑반찬들의 존재(?)를 가장 먼저 보는 편이다. 있어야할 자리에 어김없이 자리 잡고 있는  다양한 채소와 먹을거리들이야말로 그날의 식욕을 돋우는 최고의 레시피 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얼음이 동동 띄워진 시원한 동치미 국물과 적당한 고춧가루와 함께 손맛으로 비벼진 파 무침, 그리고 숭덩숭덩 먹음직스럽게 썰어진 김치야말로 완벽한 고기 맛을 좌우하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인 것이다.

여기에 물기 약간 머금은 상추를 돌돌 말아 고기 한 점, 소주한 잔과 입속에 털어 넣는다면 이것이야말로 화룡점정(畵龍點睛)이 아닐까? 언젠가 영화 토론한답시고 대포 집에서 돼지갈비 한상 시켜놓고 열변을 토하던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숯불을 손보며 우리를 향해 툭 던지듯 내뱉으신 주인 아주머니의 말이 가관이었다.

“뭐, 영화가 종합예술이라구? 이 사람아, 세상에 안 그런 게 어디 있어, 우리식당 봐, 돼지갈비 1인분만 시켜도 이 모든 게 다 딸려 나오잖아 언뜻 사람들은 돼지갈비만 먹으러 오는 것 같지만 어느 하나, 반찬하나라도 빠지거나 신선하지 않으면 손님들이 금방 알아채, 단골을 만들려면 그래야 되는 거야, 돼지갈비만 중요한 게 아니야! 그건 기본이구, 같이 딸려 나오는 것 하나하나가 다 돼지갈비 못지않아야해! 상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일정수준을 유지 하는 게 이거 아무나 하는 것 아니여, 종합예술이여.”

아주머니의 일갈에 다들 감탄하며 연신 돼지갈비를 추가하였던 그날의 추억은 이후 작품을 보는 또 다른 기준이 됐다. 골목 귀퉁이 잘나가는 식당의 돼지갈비 1인분 상차림이 이럴 진데 이른바 종합예술의 대표 격인 주자라고 일컬어지는 영화야 말로 볼거리, 느낄 거리가 가장 많이 차려져있는 은막 위의 먹을거리가 아닐까?

그렇다. 돼지갈비만 보지 말자! 상 위에 차려진 신선한 나물과 속 시원한 국물, 주인장의 은근한 손맛이 배어 있는 걸쭉한 김치에도 관심을 가져보자! 그러면 같은 상차림이라도 보다 많이 얻어갈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2000)이 그런 작품 중의 하나이다.

즉, 음미하기에 따라 훨씬 더 커다란 포만감을 느낄 수 있는 상차림과 같은 영화인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빈민촌 소년의 꿈을 담은 영락없는 성장영화이지만 조금만 집중해서 본다면 한편의 뮤직 비디오 같은 어린 육신의 다양한 열정적 독무를 볼 수 있다. 아니 웬만한 뮤직비디오보다 더 나은 듯 싶다.

그 배경이 영국의 광산촌 뒷골목이고 주인공이 어린 소년이라는 것 일뿐 이 속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표현력과 에너지가 다른 모습으로 감춰져 있다. 그냥 그 장면을 구성하는 장면 중의 하나로 지나쳐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그 무엇이 요소요소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들 알고 있는 클래식 발레 왠지 고차원적이고 편하게 다가서지 못할 것만 같은 그 세계 속이 오히려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한 소년의 괴로움과 즐거움, 희망과 좌절이 뒤범벅이 되어 숨 쉴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것이 가녀린 육체를 통해 터져 나오는 그 순간을 따로 떼어놓고 감상해 봄직하다.
〈빌리 엘리어트〉! 오랜만에 숨 막히는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오한샘  EBS 교양문화팀 PD 

1991년 입사해 <예술의 광장> <시네마천국> 등 문화, 공연 예술 프로그램을 주로 연출했다. 그 밖에 대표작으로  <장학퀴즈> <코라아 코리아> 등이 있다. 영화, 음악 그리고 미술 등에 조예가 깊으며 현재 연재하고 있는 영화음악 뿐만 아니라 '영화 속 미술 이야기'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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