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균의 코미디 철학, 한 번 들어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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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균의 코미디 철학, 한 번 들어보실래요?
[인터뷰] 시사코미디 장덕균 작가
  • 원성윤 기자
  • 승인 2008.03.19 17: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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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균’이라는 이름 앞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는다. KBS <유머1번지>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으로 5공화국 시절 우리나라 시사풍자 코미디의 첫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백발의 김형곤이 기성 정치인들을 비꼬며 “잘돼야 할 텐데” “잘될 턱이 있나”하며 턱을 두 번 치면 온 국민이 깔깔대고 웃으며 턱을 두 번씩 치곤했다.

장 작가는 ‘탱자 가라사대’ ‘영구야 영구야’ ‘변방의 북소리’ 등을 통해 우리사회의 시사 주제를 던지고 기득권에 대해 풍자하며 국민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당시 나이 불과 23살이었다.

그는 한국 시트콤의 효시라고 불리는 SBS <오박사네 사람들>을 1993년에 집필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증명되지 않았던 시트콤이라는 생소한 장르의 개막을 알리며 SBS 일대 성공작으로 평가받았다.

책 <YS는 못 말려>을 내며 첫 정치 풍자집으로 공전의 히트를 쳤는가 하면 영화 <영구와 땡칠이>, <영구와 황금박쥐>, <영구와 땡칠이-홍콩할매귀신> 등 영구 시리즈로 동심에 꿈을 심어주기도 했다.

KBS <개그콘서트>에서는 7년 넘게 터줏대감으로 자리매김하다 1년여 간 잠시 쉰 장덕균 작가는 오는 4월 <개그콘서트>에 복귀해 새로운 개그를 보여줄 전망이다. 또한 OBS경인TV에서 신개념 루머해부 토크쇼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와 최초의 사극 시트콤 <오포졸>로 다시 한 번 코미디의 역사를 새로 쓴다는 각오다.

장덕균의 거침없는 코미디 인생 27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장덕균 작가 ⓒPD저널
- ‘시사풍자 코미디’ 하면 으레 장덕균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것들이 뜸하다.
“그런 프로그램들이 반향을 많이 불러 일으켰다. 옛날에 어려운 시절에서도 했는데 지금은 왜 안하냐 이런 지적들이 있는데 조금 다른 지점들이 있다. 군부독재 시절에는 아예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고, 민주화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그런 시도들이 가능했다. 지금 현실은 오히려 녹록하지 않은 측면들이 있다. 뭐냐면 아무리 소재의 제한이 풀렸다고 하더라도 외부에서나 방송사 정책 결정자의 의지가 필요하다. 이들이 외풍을 막아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그리 자유롭지는 않다. 예전에는 ‘독재’라는 식의 명확한 대상이 있었지만 요즘은 지형이 다소 다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제대로 풀 수 있을까 연구 하고 있다.”

- 압력은 어떤 형태로 들어왔나.
“제작진에게 바로 문제제기를 하면 논란이 되니까 방송사 윗선에서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살살해라’는 관리자 형. ‘나도 승진 좀 해야 되지 않겠냐’는 인간적인 읍소형. ‘그런걸 왜 할려고 하냐’며 윽박지르는 땡깡형 등이 있었다.”

- 작가를 언제부터 시작했나.
“고등학교 1학년, 즉 17살 때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코미디 프로그램을 좋아했다. 작가로서의 문학적 소질이 있다는 이야기는 어려서부터 많이 들어서 이 직업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 결정체가 된 것은 바로 코미디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던 중 1981년에 내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됐다. 내가 직접 쓴 대본을 들고 당시 정동에 있던 MBC를 무작정 찾아가 <청춘만세>를 연출한 심상수 PD에게 읽어보라고 드렸다. 처음에는 원고를 들고 갔더니 어른 심부름 온 줄 알았는지 두고 가라고 하더라. 떨리는 심정으로 집에 가서 하룻밤을 꼬박 뜬 눈으로 지샜더니 그 다음날 연락이 왔다.

읽어봤더니 재밌다고 하더라. 몇 살이냐고 물어봐서 17살이라고 했더니 놀라워하면서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라. 하지만 그냥 무시하고 넘기기엔 아까우셨는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작가로 데뷔시켰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등학생을 어떻게 작가생활을 시켰는지 모르겠다. 대학생들이 원고를 가져와도 졸업하고 오라는 경우가 많은데 말이다. 늘 ‘내가 장덕균 데뷔시켰다’고 하시곤 했는데 27년 작가인생을 결정짓게 해준 정말 고마운 분이다. 그게 바로 나이에 비해 오랜 경험을 갖게 해준 이유이기도 하다.”

- 그렇게 어린 나이에 작가 생활을 시작했으면 학교 공부는 소홀했을 것 같은데.
“반에서 꼴지를 도맡아 했다. (웃음) 당시 어린이 프로그램하고 2개를 동시에 맡아서 했는데 만날 아이디어 생각하느라 수업시간에는 맨 뒷줄에 앉았다. 선생님은 노트에 막 끼적이니까 공부하는 줄 알았겠지만 뒤에 앉아서 노트에 아이디어를 적고 그랬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노트에 적고 작은 메모지에 적고 이런 버릇들이 그 때 형성됐다. 작품을 할 때 이런 메모지들을 보고 기억을 되살려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나에게는 메모하는 습관이 매우 중요하다. 나중에 이사 갈 때 보니까 그런 메모지를 모은 자루들이 부대로 나오는 걸 보고 나도 놀랐다.”

- 그래도 대학을 가지 않았나.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방송을 그만두고 입시공부를 했다. 당시 후기로 추계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가게 됐다. 당시는 커리큘럼이 다양하지도 않았고 시나 소설 같은 순수문학 외에는 문학을 하지 않는 분위기여서 코미디는 하나의 장르로 취급도 못 받던 시절이었다. 술도 많이 먹고 그렇게 학교를 다니다녔다. 그러다 대학교 2학년 기말고사를 앞두고 교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TV를 봤는데 TV가 참 재미가 없어졌다고 느껴졌다. 다시 방송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렇다면 MBC를 다시 찾아갔나.
“아니다. 일부러 KBS를 찾아갔다. 사람들은 MBC에 연이 있는데 아는 사람들한테 왜 가지 않냐고 그랬는데 나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검증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찾아간 것이 KBS <유머1번지> 김웅래 PD였다. 내 원고를 써서 줬더니 다음날 전화가 왔다. 같이 일하자고. 그래서 옛날 MBC에서 근무했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더니 ‘아! 그 어린 친구가 너였냐’고 하더라. 그 때부터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코너를 하기 시작했다. <유머1번지>에서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탱자 가라사대’ ‘변방의 북소리’ ‘영구야 영구야’ 등이 모두 이때 탄생했다.”

▲시사풍자 코미디는 한국의 민주화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왼쪽 상단부터 KBS <유머1번지>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의 故 김형곤 씨. MBC <코미디하우스>의 ‘3자토론’, SBS <코미디전망대> 의 ‘코미디 모의국회특위’ 모습이다. ⓒ KBS, MBC, SBS

- 그 때 나이가 몇 살이었나.
“하나, 둘…(손가락으로 세 본 뒤). 23살이었다. 당시 신문사에서 인터뷰하자고 해서 갔더니  다들 놀래더라. 이렇게 어린 친구가 그런 시사풍자를 했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방송을 하니까 미팅을 해본 적도 별로 없는데 한 번은 파트너가 된 여학생에게 내가 만든 프로그램 얘길 하니까 거짓말 한다고 나를 오히려 몰아붙이더라.”

- 어린 나이에 너무 일찍 뜬 것이 부담되지는 않았나.
“나는 늘 새로운 것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 시트콤 <오박사네 사람들>에 처음으로 도전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된 것은 ‘YS는 못 말려’라는 책이었다. 현직에 있는 대통령을 가지고 풍자를 했다는 것이 엄청난 화제가 됐었다. 그것도 대학교 1학년 때 친구들하고 대폿집에서 술 먹다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현직 대통령을 가지고 유머집을 만들면 재밌겠다’고. 그래서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책을 내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다 말리더라. 당시 ‘두환이는 골 때려’이렇게 책 냈으면 아마 지금쯤 살아남지 못했을 꺼다. 당시 엄혹했던 시절 아닌가…. 다행히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에 취임하면서 문민시대를 연다고 하기에 ‘아! 이제 내도 나 안 잡아 가겠구나’ 싶어서 책을 냈다.”

▲ 책  ‘YS는 못 말려’
- ‘YS는 못 말려’ 책 결국은 히트를 쳤다.
“40만부정도 팔아 치웠다. 정치풍자집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 나온 것이었다. 당시 얼마나 불티나게 팔렸는지 책 나온게 일간지 1면 톱기사로 실리더라. 서점에서도 많이 팔았지만 지하철 가판대에도 쌓아두고도 불티나게 팔렸다. 사실 책 내기 전날에는 될지 안 될지 반신반의한 것도 있고 혹시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하는 생각 때문에 잠도 안 왔는데 막상 다음날 반응이 뜨거워서 걱정을 좀 덜었다. 그리고 대통령이 그 책을 보고 ‘재미있는 일이다’고 하니까 방송국에서 나를 토크쇼에 섭외하려고 전화를 해대고 난리가 났다.

당시 한 일간지 문화부장은 내 팬이었다고 하면서 대담을 했는데 청와대에서 칼국수를 대접할 것이라고 했다. 당신이 문민시대의 정확한 증표를 제시한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민주화의 실질적인 증표를 갖는 것이라는 거다. 그런데 아무 연락이 없었다. (웃음) 내가 밀가루 음식 싫어하는 거 아나 싶었다. 왜 이런 얘길 하냐면 내가 클린턴 대통령 재선 당선에 맞춰 책을 쓴 적이 한 번 있는데 영문 편지를 백악관에 보냈더니 답장이 왔다. 독수리 휘장이 찍힌 클린턴 편지였는데 ‘대한민국의 작가가 나를 소재로 책을 써줘서 고맙다’는 것이었다. 한국과 미국의 차이점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상이 되는 정치인들이 배워야 할 문화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 <개그콘서트>도 정말 오랜 시간동안 맡아 작가로 활동하지 않았나.
“내가 개콘을 2000년에 맡아서 7년을 했다. 단일 프로그램을 그렇게 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한다. 요즘 시청자들의 기호로는 코너 하나가 6개월만 가도 장수한다고 본다. 개발을 그렇게 많이 하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아무리 인기 있는 코너들도 3개월쯤 지나면 준비를 해야 한다. 박수 받을 때 내려올 준비를 해야지 남들은 괜찮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계속 질질 끌다보면 본인한테도 그 프로그램에도 좋지가 않다. 세상이 초스피드 시대다. 문명이 하루가 다르게 업데이트가 되고 있으니까 그렇다. 예전에 ‘탱자 가라사대’ 이런 개그 하나가 성공하면 2년반에서 3년을 갔는데 요즘은 어림도 없다.”

- 왜 OBS로 왔나.
“MBC에서 있을 때 복도에서 오고가고 하면서 ‘우리 프로그램 뭐 한번 해야 되는데’하면서 계속 지나쳤다. 그러다 결국 프로그램을 못해보고 이대 교수로 갔다. 그 때 1년에 한 번씩은 꼭 특강을 부탁해서 이른 아침이고 아무리 힘들어도 꼭 가서 강의를 했다. 의리 때문에. 그러다 당시 약속을 하기를 ‘2008년이면 안식년 되니까 꼭 그 때 프로그램을 하자’고 하시더라. 그러더니 작년에 OBS경인TV 사장으로 발령이 난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하게 됐다.”

- 루머에 대해 파헤치자는 <진실과 구라>의 주제는 어떻게 나오게 됐나.
“최진실과 김구라가 섭외 됐다는 소식을 듣고 이거다 싶어 주변에 퍼져있는 ‘진실’과 ‘구라’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찾아봤더니 우리 생활과 역사 속에 은연 중 퍼져있는 잘못된 이야기들이 정말 많았다. 재미와 메시지를 동시에 줄 수 있는 토크쇼를 만들어 보고자 했다. 요즘 토크쇼가 너무 재미 중심으로 치우쳐있지 않은가.”

- 원래 시사풍자 코미디 전문가인데. 그 쪽에 대한 욕심은 없었나.
“사실 나도 처음에는 시사적인 주제들로 토론형식으로 토크쇼를 꾸미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연예인들만 모여서 시사적인 것을 다루기에는 재미는 있겠지만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야토론>이나 <100분토론>처럼 좋은 토론 프로그램이 있는데 우리가 거기를 좇아가다보면 정곡도 못 찌르고 변죽만 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주변에 믿을 수 없는 사실과 의혹들 가운데 은연중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것들에 대해 찾아보니 정말 많더라.”

▲OBS경인TV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 ⓒOBS

- 소재는 주로 어떤 것들인가.
“예를 들면 연예계의 카더라 통신이나 역사 속이나 생활 속에 있는 사실들에 대한 사실적 접근을 해보자는 것이다. 백제의 삼천궁녀가 정말 실존해서 살았을까? 다리를 떨면 정말 복이 나갈까? 혈액형과 성격은 정말 상관관계가 있을까? 우리가 그렇게 믿고 있다 뿐이지 사실 확인이 안 된 것이 많지 않은가. 재미와 메시지를 동시에 줄 수 있는 것으로 파고들면 시청자들의 눈길을 잡을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야기만 던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주 2가지씩 던져지는 질문에 대해  진행자들과 패널들의 토론들이 이어진 뒤 전문가의 인터뷰를 통해 루머에 대한 확실한 해부를 할 계획이다. 종전에 볼 수 없었던 산뜻한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 장덕균 본인만의 개그철학이 있다면.
“따뜻해야 한다는 것이 제1의 원칙이다. 정치풍자든 뭐든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대상에 대해 미워해버리면 이야기 자체 접근이 겉돌 수밖에 없다. 굉장히 애정을 가지고 해야 한다. 방송에서 남을 아프게 하는 것도 주의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방송이 비수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프로그램 즐겁게 해주는 게 목적 아닌가. 직장 상사나 동료, 부모에게 예의를 차리듯이 방송을 해야 한다. 그래서 시청자들에게 너무 나가는 방송들은 내 취향이 아니다.

내 자신의 모토가 즐겁게 살자는 것이다. 시청자를 웃기겠다는 PD나 작가들이 심각하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즐거워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야 발전적인 것이 나오지 않겠냐. 세상고민 다 짊어지는 것은 시청자를 속이는 것이다. 적어도 PD나 작가는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어서 했다고 어디 가서 얘기하지 않는가.”

- 최근 버라이어티물들을 보고 드는 생각은.
“일본 것들 베껴서 하는 게 너무 많다. 일본 가서 몇 개월 가 있다가 프로그램 왕창 보고 와서는 아이디어 뱅크니 새롭다는 말을 늘어 놓는데 아주 증오한다. 참고는 할 수 있겠지만 시청자들을 속이는 것 아닌가. 이런 것들이 방송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PD들이 이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성을 촉구하는 거다. 이렇게 말하면 거품 물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꺼다. 이 얘기는 여기까지만.(웃음)”

- 작가로서 가장 희열을 느낄 때는.
“방송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랑 비슷할 꺼다. 버스를 타고 어디를 간다든지 대폿집에서 술 한 잔 마실 때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내 프로그램을 얘길 할 때, 말로 표현을 못할 정도로 희열을 느낀다.”

- 작가로서 힘들 때가 있지 않나. 슬럼프 같은.
“세상에 힘들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냐. 풀 수 낼 수 있는 것을 찾아야지. 그냥 나도 공부를 많이 하고 후배들한테도 공부를 많이 하라고 잔소리한다. 내가 이야기를 갖고 있으면 방법적인 것들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공부하지 않고 작품을 쓴다는 것은 웃긴 얘기다. 나 같은 경우는 사회과학 서적부터 버스 정류장 가판에 있는 빨간 잡지까지 다 본다. 시청자들에게 최대한 맞춰 가야 된다. 자기 전에 영화 하나는 꼭 보고 잔다.”

- 앞으로의 계획은.
“일단 <진실과 구라>를 성공적으로 안착을 시킬 계획이다. 매일 OBS에 출근도장을 찍고 있다. 그리고 KBS <개그콘서트>를 쉰지 1년 반 정도 됐는데 오는 4월에 복귀할 예정이다. 기존의 개그와는 좀 다른 모습들을 보여주려고 지금 계획 중이다. 5월에는 배우 오지명이 출연하는 국내최초 사극시트콤 OBS <오포졸>을 선보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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