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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나무들은 과묵하다. 그들은 별로 말이 없다. 삶이 너무 진지하기 때문인가 보다. 그들은 1년에 한번 죽는 연습을 한다. 매년 다가오는 겨울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 알고 있다. 견딘다는 말이 적당하지 않다. 그들은 어려운 시절에 어떻게 대처하고 준비해야 하는지 항상 수련한다. 그리고 그 수련은 언제나 실제 상황이다.

가을에 잎을 떨어뜨린다. 겨울이 어떤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장 단출한 모습으로 서 있다. 스스로 이미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많은 열매를 맺었고, 달콤한 과육 속에 자신의 모습인 씨앗을 만들어 놓았다. 새도 가져가고, 바람도 가져가고, 다람쥐도 가져간다. 또한 인간도 가져간다. 심지어 발밑에 흐르는 시냇물 위에도 몇 개 띄워보낸다. 갖고 있었던 것은 모두 이렇게 나누어주고 기다린다. 더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어리석음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매우 교묘하게 자신의 욕망과 의도를 포장한다. 아름다운 빛깔과 향기 그리고 달콤한 맛으로 정성스럽게 치장한다. 그리고 그 속에, 한 가운데에 씨앗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모습을 담아 놓는다. 이내 바람이 차가워지고 눈이 내린다.

가진 게 없으니 단출하다. 이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모두 남겨 놓았으니 여한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겨울은 끝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고통이 절망이 되지 않는 이유는 미래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믿음은 그저 참고 견디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다. 그저 견딘다는 것은 좋은 시절이 와도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또 어둠과 추위 속에서 봄을 준비한다. 가지 끝에 잎의 눈을 키우고 그 속에 잎이라는 원형적 생명을 키워낸다.

봄이 오면 생강나무가 노란색 꽃을 피워낸다. 꽃은 맨몸뚱이에서 피어난다. 산수유는 가을에 열매가 맺혔던 곳에 이미 또 다른 생명을 키워내기 시작한다. 산수유꽃도 노란색이다. 그들은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는다. 겨울이 오면 버리고, 또 견디면서 봄을 기다린다.

겨울이 와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버리지 못하여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만다. 떠날 때가 되었건만 떠나지 못하므로 마침내 쫓겨난다. 추위에 좌절하기 때문에 봄을 준비하지 못한다.

언제나 그 자리에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나무에게서 배운다. 첫째, 곧 겨울이 닥쳐온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지금 이대로 잎을 달고 서 있으면 죽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지금까지 익숙했던 모든 것을 떠나보내는 것이다. 둘째는 봄을 믿는 것이다. 반드시 다시 시작해야 하는 빛나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셋째는 준비함으로써 스스로에게 신뢰를 주는 일이다. 모든 잎을 떨어뜨리고, 열매가 떨어진 바로 그 자리에 다시 꽃눈을 키우고 갈무리하는 준비를 통해 우리는 스스로에게 성숙하고 있다는 신뢰를 줄 수 있다.

세상이 얼어붙은 겨울이다. 올 겨울은 세상이 얼기도 전에 사회가 먼저 얼어버렸다. 이 겨울나기를 자연에서 배운다. 자연을 이해하는 것은 정신이다. 정신이 죽으면 인간은 끝장이다. 변화는 깨달음을 통해 정신적 판을 다시 짜는 작업이다.

▲ 최영기 독립PD

스스로에게 묻는다!
생강나무와 산수유처럼 겨울을 버틴 맨 몸뚱이 위에 다시 봄꽃을 피워낼 수 있는가?
답한다!
지금도 촛불은 타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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