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악녀’들의 드라마 등장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악한 캐릭터는 이야기를 가장 쉽게 이끌어가는 요소 중 하나다. 그러나 90년대 유행했던 트렌디 드라마가 2000년대 들어 주춤하면서 극단적인 성격의 악녀 역시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최근 인기 드라마를 보면 ‘권선징악’과 복수라는 모티브로 악녀들이 주요 인물로 다시 등장하고 있다.
이른바 막장드라마의 대표로까지 분류되는 SBS 일일드라마 <아내의 유혹>의 애리(김서형 분)는 악녀 중의 최고봉에 있다. KBS 주말연속극 <내사랑 금지옥엽>의 영주(최수린 분)와 MBC 일일드라마<사랑해 울지마>의 서영(오승현 분)은 착한 주인공을 괴롭히고 극중 갈등을 유발하는 전형적인 ‘악녀’의 모습을 하고 있다.
특히 이 두 드라마는 방송 초기 밋밋한 극 전개를 악녀들의 출연으로 긴장감 있게 이끄는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첫 방송 이후 한 자리 수를 유지하던 <사랑해 울지마>의 시청률은 서영과 영민(이정진 분)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고 서영이 복수심으로 들끓으면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편에선 이런 악한 인물들의 악행이 극단적으로 표현되면서 극전개의 개연성을 떨어뜨리고, 드라마의 질적 하락을 초래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20년 동안 한 집에서 함께 자란 친구의 남편을 꼬여내 그 남자와 재혼을 시도하고 성공을 위해 갖은 거짓말을 일삼는 <아내의 유혹>의 애리는 그야말로 악의 화신으로까지 취급되고 있다.
<아내의 유혹>과 차이가 분명 있긴 하지만 <내사랑 금지옥엽> 역시 큰 틀에서 악녀의 악행이 극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따뜻한 부성애를 그리겠다는 애초 기획 의도와 달리, 자극적인 내용이 극을 압도하고 있다. 젊은 연하의 남자와 사랑에 빠진 영주는 남편인 전설(김성수 분)과 자식을 팽겨 치고 이혼한 뒤 몇 년 동안 단 한 번도 되돌아보지 않다가 그 남자와 이별하자 갑작스럽게 재혼을 결심한다.
이 과정에서 남편이 사랑하는 인호(이태란 분)를 떼어내기 위해 직장에서 머리채를 잡는가 하면 인호의 아버지를 찾아가 “두 사람이 결혼을 하면 둘 사이를 떼어내기 위해 무슨 수를 쓰겠다”며 악담을 퍼붓는다.
<사랑해 울지마> 역시 서로 다른 상처를 가진 두 남녀의 사랑과 가족애를 기본틀로 담고 있지만 갑작스런 복수극의 전개는 오히려 극 흐름을 지나치게 극단으로 몰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영민과의 이별 후 아이를 갖게 된 서영은 영민에게 재결합을 애원하지만 영민이 이를 거부하자 영민이 사랑하게 된 미수(이유리 분)에게 복수의 화살을 쏘아댄다. 미수가 프리랜서로 일해 온 기획사에 압력을 가해 해고시키고, 미수의 오빠가 서영의 아버지가 재단이사장으로 있는 학교에 교수로 임용된 사실을 알자 오빠의 인생까지 망치겠다는 협박을 일삼는다. 이런 서영의 복수는 다소 억지스럽고 자연스럽지 못하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런 드라마들이 최근 경기침체에 따른 피폐한 사회상을 반영한다는 분석을 제기한다. 사회가 복잡하고 어수선하면 오히려 단순화된 캐릭터에 시청자들이 반응을 보이고, 이런 드라마가 사회적인 스트레스를 한꺼번에 풀어내는 창구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는 “사회가 어지럽거나 경제상황이 힘들어질수록 대중문화 콘텐츠에 저열한 악역들이 많이 등장하는 경향이 있다”며 “사회문화적으로 분노의 대상이 응집돼야 하고 그에 따른 응징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는 이런 독한 드라마의 설정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악행을 하는 ‘공공의 적’을 만들면 드라마의 전개가 단순해지고 쉽기 때문에 이런 식의 드라마 작법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수십년 동안 나쁜 시어머니나 부자 등이 악행을 일삼는 대표 주자로 활약해온 것은 이를 반증한다.
문제는 이런 캐릭터들의 악행이 개연성을 떨어뜨리고 도를 넘어설 때 발생한다. 특히 경기침체로 드라마 시장이 어려운 상황을 틈타 경영진을 비롯해 제작진들이 이런 유혹에 빠져들기 쉽다.
KBS 한 드라마 PD는 “현장에서는 이른바 독을 탄다고 하는데 심하게 독을 탈 경우 동업자 입장에서 앞으로 제작은 더 힘들어진다”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상황이 될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MBC 한 드라마 PD도 “우리나라 드라마는 넓은 시청층을 흡수하기 위한 전략으로 비교적 복합적인 인물보다 단순한 인물구도나 성격을 단면화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드라마가 억지스럽고 거칠고 개연성이 부족할 경우 좋은 드라마는 오히려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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