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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인권] 김진웅 선문대학교 교수

요즈음 인권과 관련된 사건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따라서 어느 하나의 개별 주제에 관한 분석적 사고보다는 여러 사안들을 아우르는 통합적 단상이 떠오르곤 한다. 미디어법 개정, KBS 사태, 미네르바 사건 등 최근 이슈들을 언론인권 측면에서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나? 다소 엉뚱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현안들이 ‘인클로저 운동’과 연관되어 회상되곤 한다.

▲ 중앙일보 2월2일자 5면.
사전적 의미로 인클로저(enclosure)는 울타리를 치는 것을 뜻하는데, 역사적 차원에서는 매우 중차대한 사건으로 인식된다. 유럽을 중심으로 중세 봉건시대에는 마을 단위로 형성된 공유 경작지가 약 600년 이상 존립되었다. 비록 영주가 소유한 형태이기는 하나 자영농들은 이곳 땅을 토대로 자급자족적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공유지는 이들에 의해 민주적으로 관리되는 공동체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산업혁명에 기반한 사적 자본주의 물결은 이곳을 사유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서 영주나 대자본가가 섬유산업에 필요한 원료를 생산하려고 양을 키우기 위한 목초지로 전환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16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진행된 인클로저 운동이다.

땅소유자인 영주 입장에서는 소작농들이 지불하는 소작료보다 목초지에서 나오는 이윤이 훨씬 더 많았으니, 공유지의 인클로징화(enclosing)가 당시 대세적 흐름이었다. 그러나 과거 공유지에서는 1에이커당 670파운드의 빵을 생산했는데 비해, 목초지에서는 176파운드의 양고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수많은 소작농은 졸지에 경작할 땅을 잃고 강제로 쫓겨났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고향을 떠나 도시노동자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인클로저 운동과 최근 언론흐름의 공통점은 두가지이다. 첫째는 사유화라는 흐름이다. 언론은 공유지이다. 그 중에서도 매체의 특성상 방송과 인터넷은 더욱 그러하다. 공영방송은 방송이 공유지임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개념이고, 이를 위한 보호장치이다. 또 인터넷은 드넓은 바다 혹은 무주공산의 공유지이다. 이들 언론공유지는 소통의 공간이다. 여기에 울타리를 칠 경우 사회적 소통은 편통(偏通) 또는 불통으로 변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울타리를 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곤 한다.

▲ 김진웅 선문대학교 교수, 언론인권센터 정책위원장
둘째는 소수의 권리가 신장되는 대신, 다수의 기본권이 침해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즉 영주, 자본가의 이윤추구의 반대급부로서 다수 농민의 생존권 또는 시민의 기본권이 빼앗길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다. 특히 최근의 언론정책과 관련해서는 다수 국민이 여론주체가 아닌 ‘여론노동자’로 자리 매김될 가능성도 배제키 어렵다. 그러나 이는 일련의 합법적 정치적 장치를 통해서, 그리고 장기간 변혁의 결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를 포착하기가 쉽지 않다.

디지털시대 ‘언론공유지’에서는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거대하고 강력한 물줄기가 끊임없이 솟아오른다. 이를 여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조잡한 울타리를 치거나 둑을 만든다고 이를 차단할 수는 없다. 이 시대의 정치인이라면 이를 파악하는 통찰력 내지 직관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데올로기적 정향을 떠나서 말이다.  

인클로저 운동 당시 상황을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양이 사람을 먹었다”고 꼬집었다. 또 어떤 역사가는 인클로저운동에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부자들의 혁명’의 그림자를 읽어냈다. 언론과 관련된 최근 상황에서 ‘농민과 영주’, ‘빈자와 부자’의 그림자가 비춰 보이는 것은 나만의 환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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