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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PD의 터닝포인트]

▲ 이채훈 MBC PD ⓒMBC
“새로 돋아나는 연두빛 새 잎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한여름의 무성한 초록은 초록대로, 울긋불긋한 단풍은 단풍대로, 떨어져 뒹구는 낙엽은 낙엽대로 모두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사람의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늙음도 단풍처럼 아름다움의 하나입니다.”
- 법륜 <행복하게 늙어가려면>에서

정 선배님, 갓 입사한 애송이 AD였던 제가 선배님을 모시고 <차인태의 출발 새아침>을 한 게 벌써 25년 전이군요. 밤늦게 지방 출장 다녀와서 편집실에 짐을 푸시던 선배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몸이 약하신 편이라 자정을 넘기면 많이 힘겨워 하셨지요. 새벽에 편집 마치고 선배님 댁에서 잠깐 눈 붙인 뒤 떠오르는 햇살 보며 생방하러 가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선배님은 아이템의 포인트를 짚어내는 감각이 뛰어나셨고, 의사결정이 명쾌하셨고, 효율적으로 일하는 센스가 돋보이는 선배였습니다. 여러모로 미흡하지만 PD인 저를 만든 여러 자양분 중에는 선배님의 가르침도 분명히 있을 것이며, 그 점 감사드립니다. 

어느새 선배님은 정년을 코앞에 두게 됐고 저도 만 50이 됐습니다. 해마다 파릇파릇한 신입사원들이 들어오지요. 옛날 같으면 아우같이 느껴지던 신입사원들이 이젠 아들, 딸 같습니다. 다 예쁩니다. 나이 먹는 줄 모르고 좌충우돌 살아온 날들을 생각해 봅니다. 선배님 모시고 일하던 시절은 연두빛 봄, 파업하느라 감방 구경 해 보고 묵직한 다큐멘터리 펑펑 쏘아댈 때는 무성한 초록, 그리고 이제는 울긋불긋 단풍 물드는 가을인 것 같습니다. 저도 PD 생활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준비를 할 때가 된 게 아닌가 가끔 돌아보곤 합니다.

선배님이 걸어오신 길은 제 앞에 있으며, 더욱 길며, 더 많은 추억으로 가득 차 있겠지요. 이제 정년이 눈앞이니 과거를 돌아보는 감회가 남다르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마음 고생 몹시 심하실 줄 짐작합니다. 선배님께서 아름답고 명예롭게 회사 생활을 마무리하시고 후배들의 갈채를 받으며 떠나시기 바라는 마음, 누구 못지않게 간절합니다. 그러나 ‘선임자 노조’ 창립부터 ‘공정방송 노조’로 변모하여 최근의 논란이 빚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보면서 안타깝고 마음이 무거웠음을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정방송 노조’를 둘러싼 여러 논의를 되풀이할 생각은 없습니다. 87년 6월 항쟁 이후 숱한 사원들이 희생을 무릅쓰고 일궈온 ‘방송의 자유’를 부정하는 듯한 최근의 말씀에 대해 항의할 생각도 없습니다. MBC 내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표출될 수 있고, 서로 다른 의견들로 치열하게 토론하고 지혜로운 결론으로 승화시킨 숱한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 조선일보 2월5일자 2면.
하지만 최근 사태는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심각한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정치권의 압력으로 회사가 창사 이래 최대 위기에 빠진 지금, 우리 사원들의 단합이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이번 사태가 세대 간의 갈등으로 번져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게 제 염려의 핵심입니다. 불순한 의도로 방송판을 갈아엎으려는 세력과 일부 수구 언론들이 가장 원하는 게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선배님께서 그 세력들과 교감을 갖고 행동해 오셨다는 일부의 지적을 저는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방송 PD의 ‘정명’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선배님이 걸어오신 길과 저의 길은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방송인, PD로서 동류의식을 가질만한 ‘비슷한 길’을 함께 걸어왔고, 또 끝까지 그렇게 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선배님께서 후배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고 계신 것이 안쓰럽습니다. 세대간 갈등이 불붙을까봐 몹시 걱정도 됩니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공정방송 노조’ 내에서도 비판의 소리와 사퇴 요구가 나왔군요. 현 사태가 세대간 갈등은 아닌 듯하여 다행스럽지만, 선배님의 어려운 상황을 생각하면 안타깝습니다. 이 지경에 오기까지 숱한 굴절과 갈등이 있었을 줄 압니다. 꼬일대로 꼬인 매듭을 푸는 게 쉽지 않겠지요. 하지만 그럴수록 잘못된 일은 깨끗이 인정하고 흔쾌히 결단을 내리시는 게 옳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외주제작센터에 있을 때 좋아하는 선배 동료 몇 분이 ‘선임자 노조’ 가입을 강력히 권유하셨습니다. 선임자들의 권익을 대변할 공식조직이 전혀 없다, 자신의 권익은 자기 스스로 주장해야 한다는 취지였지요. 그 동안 MBC 사원으로 적지 않은 혜택을 받으며 살아온 입장에서 또 복지를 내세우는 게 찜찜하긴 했지만, “복지 혜택을 받는다면 조합비를 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심정’으로 가입했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모셨던 선배님께서 주도하신다는 점도 분명 가입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위원장 선거 과정에서 여러 가지 실망스런 모습과 아름답지 못한 얘기들을 들었습니다. 여러 정치적인 소문들이 있었지만 제가 직접 확인한 게 아니니 사실이라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더군요. 그래서 곧 탈퇴했습니다. 굳이 논쟁을 하거나 목소리를 높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잠시 ‘선임자 노조’에 가입했다는 점 때문에 몇몇 동료들로부터 따가운 질책과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모두 달게 들었습니다. 

이 과정을 선배님께 굳이 설명하지는 않았습니다. 감히 선배를 설득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제가 설득될 가능성도 별로 높지 않았고, 진정 성실한, 기나긴 대화를 해낼 시간과 끈기도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다만 옳은 길을 가시기 바라며 우려의 심정으로 지켜보기만 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같은 사무실인데 선배님 자리로 찾아뵙고 말을 건넬 용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게 제 자리를 찾기 바랍니다.

이제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자연은 정직합니다. 선배님의 PD인생도 울긋불긋한 단풍처럼 아름답게 저물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아무쪼록 지금의 갈등을 지혜롭게 수습하고 맑은 하늘을 다시 보고 싶습니다. 선배님의 결단을 기대합니다. 후배들의 진심어린 박수를 받으며 멋지게 떠나시는 존경스런 선배님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2009년 2월 12일, 아직도 후배인 이채훈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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