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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드릭스의 책 읽기] (5) ‘희망의 인문학’ & ‘행복한 인문학’

20년 지기 친구들이 있다. 8살 때부터 딱지치기와 구슬치기, 다방구, 얼음땡을 같이했고,  축구와 농구를 했었다. 중고등학교 때에는 같이 담배를 몰래 훔쳐다 피웠다. 그런데 20살이 되고, 나는 그 친구들과 눈에 띄지는 않지만 천천히 멀어져갔다. 그 녀석들은 대학에 가지 못했거나 않았고, 난 대학에 갔다.

내가 OT에 가고, MT에 가고 학교생활에 맛이 들렸을 때 그 녀석들은 돈을 벌거나 군대를 일찍 갔고, 몇 해 지나자 나의 모습과 그들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묶이기 힘든 것인 것을 알게 되었다. 나와 그 녀석들과 함께 할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 난 내가 배운 것들을 아는 척하면서 떠들었을 따름이다. 매일같이 보던 친구들은, 곧 1년에 한두 번 보는 사이가 되었다.

▲ 희망의 인문학 -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얼 쇼리스, 이매진)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 한동안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미국의 빈민가에서 하루하루를 때워가면서 사는 이들에게 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양식’인 인문학을 강의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그의 경험담이 묶인 책이었는데, 난 이런 프로그램이 국내에서는 잘 진행되지 않는 줄 알았다. ‘담론의 층위’를 운운하는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은 항상 상아탑 뒤에서 한 발 물러서 이야기하거나, 혹은 ‘현장’의 ‘무지몽매한’ 대중들과 만나지 않겠거니 회의했던 것도 사실이다.

〈행복한 인문학〉은 노숙인들과 저소득 계층 등 우리사회에서 억눌린 사람들에게 인문학을 강의했던 사람들의 기록이다. 여러 가지가 어려울 것으로 느껴졌다. 일단 지금까지 입에서 맴맴 도는 지식인의 말투와 문장을 어떻게 생활인들과 맞춰야 할지가 막막할 테고, 또 그들 생활인에게 적절한 인문학의 내용의 선정이 만만찮아 보였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문제는 ‘가르치려는 태도’에 있다. 우리는 일방적으로 선생이 학생을 가르친다는 방식에만 익숙했을 뿐, 사실 지식을 전달하는 선생 역시도 학생들에게 배운다는 것을 잊고 산건 아닐까? 〈행복한 인문학〉에서 학생들인 ‘선생님’들에게 선생인 ‘교수’야 말로 많은 것들을 배우고 감동한다.

“그 순간 난 그 사람들과 나 사이에 당연히 존재하리라고 믿었던 어떤 벽이 한순간 흔적 없이 사라지는 느낌에 가슴이 뭉클했다. 아니, 실은 처음부터 그런 벽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나 혼자서 관념으로 만들어내고 쌓아올린 벽이었을 뿐(p.30).

이분들이 그리웠던 건 고급 인문학 지식이나 멋진 글쓰기 요령이 아니라,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잠시나마 빠져 나와 삶을 성철하고 서로를 위로해주는 시간들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인생 경험으로는 나의 스승격인 이분들과 비록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 할 수 있었던 내가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시간들이 아닌가 싶다(p.91).”

어느 순간 선생과 학생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서로 배워가면서 서로 공감하고 치유하는 관계들이 만들어 진다.

▲ 행복한 인문학 - 세상과 소통하는 희망의 인문학 수업 (고영직 외 4인, 이매진)
인문학 과정을 이수한 사람들이 갑자기 로또에 당첨된 것처럼 인생역전이 되어서 돈을 많이 벌었다거나 굉장한 권세를 누리게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얻은 것은 자신들 하나하나가 소중하다는 자존감의 회복이었고, 또한 그들은 여전히 공동체라는 곳이 열려있고 자신들이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확인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말’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 자신이 쓰는 글쓰기는 그들을 치유한다.

많은 지식인들이 자신들만의 ‘암호’들을 가지고 소통한다.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을 쉽게 열어주지 않는 ‘대중’에 대해서 혐오감을 비추기도 한다. “대중은 무식하다”며, 자신의 계급의식도 없이 어떤 정당을 찍는다며 비관하곤 한다. 그리고 그 순간에 기성 질서는 점점 억눌린 자들의 배제를 심화하고, 양극화는 더욱더 악화되고, 부와 권력의 세습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다. 그 정점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지 않는가?

오늘 내일 반찬거리와 월세에 시름하는 사람에게, 그리고 그마저도 없이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이들이 공부하는 인문학은 그들을 다시금 시민으로 일깨워주는 ‘시민권’이 된다. 또한 그들이 자신들을 둘러싼 사회를 맑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안경’이 된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의 회복된 자존감은 부조리함에 대항하는 ‘무기’가 된다. 그런 흐름들이 곳곳에서 솟구칠 때, 그 때야 말로 다시금 거대한 사회의 변화가 시작되지 않을까?

나도 친구들과 다시 소주 한잔이라도 기울이면서 소설책이라도, 수필이라도 하나 전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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