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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인권] 김학웅 변호사 (언론인권센터 언론피해구조본부장)

▲ 김학웅 변호사 / 언론인권센터 언론피해구조본부장
무죄 추정의 원칙도 모르는 무식한 나라들?

얼마 전 있었던 연쇄살인범의 초상 공개를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졌고, 중요한 대립 구도의 한 축은 무죄추정의 원칙 vs 알 권리였다. 그런데 무죄추정의 원칙 때문에 연쇄살인범의 초상을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대로라면, 이와 유사한 중대 범죄인의 초상을 공개하는 나라들은 졸지에 무죄추정의 원칙도 모르는 무식한 나라들이 되 버리고 만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면 무죄추정의 원칙상 당연히 인정되는 불구속 수사 원칙 때문에 구속수사는 위헌적이고 수사 편의적인 제도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데 중대 범죄인의 초상을 공개하는 나라는 우리 법제도의 모델이 되었던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고, 구속 수사 역시 일정한 요건을 갖춘 경우에 형사소송법이 인정하고 있는 제도란 말이다.    

무죄 추정의 원칙의 등장

무죄 추정의 원칙은 절대 왕정 시절 정치적 강자인 국가 권력이 선량한 시민을 일단 잡아들여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며 고문을 해서 자백을 받아 다른 객관적 증거가 없더라도 자백만으로 유죄 판결을 하던 사또 재판의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 프랑스 혁명 이후에 탄생한 근대의 산물이다. 그래서 무죄 추정의 원칙, 불구속 수사의 원칙, 고문 금지의 원칙, 자백의 보강법칙(피고인의 자백이 피고인에게 불이익한 유일한 증거일 때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하지 못하는 원칙)은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원칙이 되었던 것이다.

이쯤에서 센스 있는 독자라면 무죄추정의 원칙이 형사 소송 절차에서 국가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나온 원칙이란 걸 눈치 챘을 것이고, 무죄 추정의 원칙 때문에 중대 범죄인의 초상 공개가 금지된다면 유죄가 확정되고 나면 공개를 해도 된다는 것인지, 이 원칙이 도대체 형사 소송 절차와 상관없이 언론에 의해 이루어지는 초상 공개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를 궁금해 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죄가 확정된 경우라고 하더라도 범인의 신원을 밝혀야만 할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범인의 신원을 밝히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따라서 무죄추정의 원칙과 언론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상되는 당연한 반론 하나! 무죄 추정의 원칙은 헌법상의 원칙이니 우리 국민 모두가 지켜야 하는 원칙이 아니냐고? 그에 대한 대답! 그러면 미국산 쇠고기를 먹은 누군가가 광우병에 걸리고 관련자들이 유죄 확정 판결을 받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되어야 하니 미국산 쇠고기를 안심하고 먹어야 하나? 그러면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우려 관련 보도를 하는 것도 무죄 추정의 원칙에 위반되나? 무죄 추정의 원칙이 무슨 만병통치약이야? 이건... 정말... 아니잖아.

▲ 조선일보 1월31일자 1면.
바람직한 논의를 위한 제안 - 인격권 vs 알 권리
 
무죄추정의 원칙은 역사와 경험의 산물로 탄생한 근대 시민 혁명의 쾌거이자 선량한 시민의 형사 절차적 권리를 보장한 최소한의 안전판이므로 존중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중대 범죄인의 초상 공개는 무죄추정의 원칙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므로 논의는 무죄추정의 원칙 vs 알권리가 아니라 인격권 vs 알 권리의 구도로 가야하고, 중대 범죄자의 초상권이 알 권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인지 여부(공중의 정당한 관심의 대상인지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인지), 알 권리의 충족을 위해 중대 범죄자의 얼굴을 공개할 경우 그로 인해 발생할 수도 있는 문제(초상 공개의 정도를 넘어서 범죄인과 가족들의 사생활을 파헤치는 작태와 가족들이 입게 될 피해)를 제도적으로 해결한 것인지로 모아져야 할 것이다. 결국 무죄 추정의 원칙의 연혁적․제도적 의미를 잊은 채 이 원칙과 작금의 사태를 연관시키는 것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자칫 올바른 논의의 방향을 흐릴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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