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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영국=배선경 통신원

지난 1월23일 BBC 텔레비전 센터 앞에는 파파라치를 비롯한 각종 미디어 취재진들이 몰렸다. 이유는 BBC의 간판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인 〈조나단 로스 쇼〉의 녹화가 있었기 때문인데, 이 날은 12주 동안 BBC 출연 정지를 당한 조나단 로스가 다시 방송으로 컴백하는 날이었다.

영화 평론가이자 방송 진행자인 조나단 로스는 특유의 허를 찌르는 재치있는 입담으로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은 물론 각종 시상식의 진행을 맡고 있는 영국의 유명 방송인이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내뱉는 듯한 거침없는 언변으로 때로는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지만 10여년의 세월 동안 그는 늘 정상의 자리에 있는 듯 보였다. 적어도 지난해 10월말에 있었던 일명 ‘사치게이트’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2008년 10월 18일 러셀 브란드(독특한 패션과 솔직하고 엉뚱한 진행으로 인기가 있는 영국의 방송인. 최근 사치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진행하던 라디오방송을 사임했다)의 라디오방송에 출연한 조나단 로스는 진행자인 러셀 브란드와 함께 영화배우 앤드류 사치의 자동응답전화기에 메시지를 남겼는데, 이 메시지 내용이 방송에 그대로 나가게 되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메시지는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정도가 지나친 음란한 내용을 담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한 개인의 사생활과 관련되어 있었다. 두 사람의 못된 장난이 방송을 타면서 스타 진행자의 자질문제가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됐다. 결국 프로그램 진행자였던 러셀 브란드는 사임했고 게스트로 출연한 조나단 로스는 12주 동안 BBC의 모든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없게 되었다.

▲ BBC <조나단 로드쇼>의 한 장면. 방송 컴백 첫회 게스트로 나온 톰 크루즈와 조나단 로스 ⓒ<가디언>
무책임한 실수였을까? 누구의 무책임한 실수인가? 두 스타 진행자의? 그렇다면 두 사람이 벌을 받으면 끝나는 문제인가? 사건 직후 사임한 러셀 브란드는 진행자로서 책임을 지고 스스로 벌을 준 셈이다. 반면 게스트로 출연했던 조나단 로스는 BBC로부터 12주 출연정지라는 벌을 받았다. 같은 장난을 치고도 한 사람은 강하게 한 사람은 약하게 벌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어쨌든 두 사람 모두 벌을 받았으니 이 문제는 일단락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해프닝의 진짜 주인공은 BBC다. 각종 민망한 스캔들을 달고 다니는 러셀 브란드를 라디오 진행자로 앉힌 것도 BBC고 조나단 로스에게 일년에 600만 파운드가 넘는 돈을 지불하는 것도 BBC다. 문제의 저질스런 만담을 수집한 것도 BBC고 편집 없이 -편집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배포한 것도 BBC다. 책임과 실수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벌은 BBC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적극적으로 떠안아야 하는 것이다. 다행히 BBC는 이 문제의 일차적 책임이 진행자가 아닌 책임 프로듀서와 책임 컨트롤러에게 있다고 인정했고 두 명의 책임 간부들이 사임하게 됐다.

소위 ‘수신료 납부자들을 위한’ 질 높은 방송을 추구하는 BBC는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방송의 질을 감시하기 위한 최고의 노하우와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해도 100% 안전한 방송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세계 최고의 공영방송이라고 자부하는 BBC마저도 러셀 브란드와 조나단 로스류의 엔터테이너들 –위험하지만 유일한 독창성이 있는– 을 선호하는 시대이니 ‘안전한 방송’을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어불성설이다.

사치게이트 사건을 지켜보면서 방송에 들락날락하는 수많은 스타들과 그들에게서 최고의 재능과 더불어 최고의 시청률을 끌어내고 싶어 하는 방송사들(혹은 프로듀서들)의 모습을 겹쳐 보게 된다. 공인으로서의 책임은 비단 스타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스타들의 끼와 탤런트를 맘껏 활용하고 싶어 하는 방송업계 종사자들이라면 그들도 공인으로서의 책임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영국=배선경 통신원/ LSE(런던정경대) 문화사회학 석사, sunkyungbae@google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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