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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건식PD의 미국리포트(9)]

▲ 박건식 MBC PD
소유권 완화 정책과 클리어 채널의 흥망사

미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매체는 라디오다. 미국인 삶의 절반은 차량 안에서 이뤄진다고 할 만큼 자동차 문화가 발달한 미국에서 라디오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생활 필수품이다. 이들은 자동차 안에서 음악을 듣고, 프로 야구 중계를 들으며 목적지로 향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날씨, 교통 정보다. 폭설이 내린 다음날 자녀가 학교에 가는지 아닌지, 허리케인, 토네이도가 몰려오는지 등등의 정보는 라디오를 곁에 두지 않을 수 없는 필수 이유다. 미국에서 라디오 청취자는 대략 2억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그런데 1996년 방송통신법 통과로 라디오 시장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한 회사가 소유할 수 있는 라디오 방송사의 소유제한을 없애 버린 것이다. 이 법안 하나가 라디오 시장에 끼친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법안 통과 이후 50%가 넘는 라디오 방송사들이 클리어 채널(Clear Channel)이나 비아콤 같은 방송사들에게 매각됐다. 특히 40여개 방송사를 운영하던 클리어 채널은 법안 통과 후 1200여 개의 방송사를 거느린 미디어 공룡으로 급성장했다. 산업지표면에서도 1995년 라디오 산업의 1.3%를 차지했던 클리어 채널은 규제의 고삐가 풀린 지 6년만인 2001년 20%이상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인수 합병 후 대량 해고가 이어졌다. 기자들과 아나운서, 프로듀서, 엔지니어 등 무려 1만 명의 클리어 채널 소속 라디오 종사자들이 해고됐다. 제작 비용을 절감하고 광고수입을 늘리기 위해 지역뉴스나 지역 제작 프로그램은 급격히 줄인 결과였다. 클리어 채널 그룹 산하로 들어간 지역 라디오 방송사들은 단순한 중계소로 전락했다. 기자, PD들이 사라진 지역 라디오 방송사가 하는 일은 지역 광고를 집어넣는 것밖에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엔 전국적인 라디오 토크쇼가 2-3 시간을 매워주며 수익을 증대시켜 주었다.

동시에 지역 음악인들의 음악을 소개할 공간도 사라져 버렸다. 음악의 다양성도 사라져 버렸다. 독점적 지위를 누리게 된 클리어 채널 방송사가 돈을 받고 음악을 틀어주었기 때문이다. 방송사에게 뇌물을 쓰지 않은 음악가나 음반은 클리어 채널 라디오 방송사에서 사라졌다. 한동안 사라졌던 뇌물(Payola)의 관행이 부활한 것이다.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DJ가 아니라, 오너에게 돈이 들어갔다는 점이다.

▲ 클리어채널.
반면, 라디오의 사상 검열이 생겨났다. 금지곡 리스트 (Blacklist) 가 생긴 것이다. 반전과 평화를 노래한 캣 스티븐스(Cat Stevens)의 평화열차(Peace Train)과 존 레넌(John Lennon)의 이매진(Imagine) 등이 금지곡 리스트에 오르며 클리어 채널에서 사라졌다.

가장 심한 폐해는 재난방송에 대한 무시와 무관심에서 나타났다. 전력과 전선에 대한 낮은 의존도와 신속함은 라디오를 재난방송의 대명사로 여기게 해왔다.

그러나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남부에 몰려왔을 때 미디어 재벌 클리어 채널의 라디오들은 재난방송은 하지 않고, 음악 방송만 틀고 있었다. 광고와 수익에 목을 매단 결과, 획일적인 전국 방송이 가동된 결과였다. 또, 자체 취재인력들은 해고된 뒤였다.

결과적으로 라디오 방송이 제 때 재난 방송을 하지 않음으로써 주민들이 대피를 하지 못해 피해를 키웠다는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말았다. 이때 초기부터 긴급 재난 방송을 한 라디오 매체는 저출력 공동체 방송인 WQRZ와 군소 지역 라디오 방송인 WWL 등이었다. 이들은 CNN, NBC, ABC 등 TV와 클리어 채널 등의 대형 라디오 미디어들이 손을 놓고 있던 초기에 이들은 24시간 사투를 벌이며 수많은 생명을 구해냈다. 결국 태풍이 지나간 뒤에 뒷북을 친 공룡 미디어 재벌에 대한 비난이 쇄도했고, 지역 미디어와 공동체 미디어의 역할에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1996년 라디오소유권 완화조처 이후에 클리어 채널이 보여준 부정적 폐해는 이후 2003년, 2008년 TV 채널에 대한 겸영 시도가 번번이 좌절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미국 국민들에게 공룡 미디어 재벌은 공공의 이익에 복무하기는커녕 미디어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황소 개구리’로 인식되었다. 많은 미국 국민들이 라디오 채널의 소유권 완화로 나타난 폐해에서 TV의 미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경영면에서도 클리어 채널은 문제를 보였다. 잦은 인수 합병을 통해 규모를 키웠지만, 속으론 골병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경영난에 시달리던 클리어 채널은 몇 년간의 협상 끝에 지난 해 7월 사모펀드인 베인캐피털 등에 넘어 갔다. 미국 언론들은 이를 ‘거대 미디어 제국의 몰락’으로 묘사했다.

그런데, 문제는 클리어 채널뿐만이 아니라는데 있다. 미국에선 폭식과 과식을 일삼던 하던 미디어 황소 개구리들이 요즘 연달아 쓰러지고 있다. 배탈이 난 것이다. 미디어 트렌드를 읽지 못하고 무리한 인수합병에만 열을 올리고 정작 경영 내실화는 소흘히 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위성 라디오 시장을 급성장시켜오던 시리우스 엑스엠(Sirius XM) 역시 인수, 합병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파산 위기에 몰려 있다. 또한 시카고 트리뷴, 로스엔젤레스 타임스 등을 소유한 ‘트리뷴 컴퍼니’의 파산, 케이블 그룹 차터 커뮤니케이션, 일간지 그룹 레지스터의 파산... 이제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미디어 기업의 파산 소식은 식상할 정도가 되었다.

이들 미디어 기업이 쓰러지는 것은 경제위기 탓이 크겠지만, 근본적으로는 ‘탈규제’의 미국 미디어 정책 때문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인수, 합병 겸영 등 규제의 벽이 철폐된 1996년부터 미국 언론 재벌들은 부나방처럼 무리하게 사업확장 경쟁에 뛰어 들었다. 먼저 먹는 자가 임자였고, 내실 경영에 대한 우려는 뒷전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외형적 성장의 이면에 부채는 눈덩이처럼 쌓여갔고, 광고 규모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었다. 반면, 인터넷 기업은 무섭게 성장하며 광고 파이를 잠식해 들어왔다. 그 동안 속으로 골병이 들어 있었던 미디어 기업들은 2008년 경제 위기가 시작되자마자 하나 둘 맥없이 쓰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규제 없는 미디어 정책이 황소 개구리를 만들었고, 이제 생태계를 교란시켜 온 황소 개구리는 폭식 끝에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누가 황소 개구리를 연못에 던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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