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은 격동의 시대, 무거운 십자가를 묵묵히 진 채 민주주의로 우리를 이끌었고, 가난한 자·약한 자에게 베푸는 삶을 가르친 우리 시대 진정한 목자였다.”(MBC 스페셜 ‘우리 시대의 목자, 김수환 추기경’ 中)
(일부 언론에 따르면) 가히 ‘신드롬’이라 할 만 하다. 지난 16일. 김수환 추기경 선종 이후 온 사회가 추모 열기로 들끓었다. 특히 언론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지난 일주일 동안 김 추기경에 대해 무수히 많은 기사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다수의 언론은 단순히 신드롬 ‘만들기’에 그쳤다. 도대체 ‘무엇’을 추모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수 십 만에 이른 추모객이 언론의 주된 관심사였다. 김 추기경의 삶을 따라 나눔·사랑을 강조했지만, 표피적 전달에 그쳤다. 초점이 빗나갔다.
김수환 추기경은 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곁에 있었다. 특히 달동네 주민들, 철거민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기 와서 사신 지 얼마나 됐어요?” “거의 5년 이상 됐습니다…”
김 추기경은 철거민촌을 찾아 직접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덕분에 많은 카메라들이 그곳을 비췄다.
“추기경님이 상계동 철거민들과 성탄 미사를 하는데 정부에서 어떻게 생각하겠나. 추기경님이 움직이는 것 자체가 큰 의미를 갖는 거다. 그 사람들을 그냥 쫓아내선 안 된다는….”
88올림픽을 앞둔 87년에는 서울시에서 대대적인 철거 작업을 진행했다. 상계동에선 세 명이 목숨을 잃었고, 많은 이들이 거리로 내몰렸다. 쫓겨난 그들이 찾은 곳은 김 추기경이 있는 명동성당이었다. 추기경은 그들을 따뜻하게 맞았고, 300여 명의 주민들이 사도회관 앞뜰에 천막을 짓고 1년을 살았다.
1978년 동일방직 여공들 역시 명동성당을 찾았다. 1967년, 매일 12시간의 노동을 견딘 끝에 노조를 만들고 혈서까지 썼던 심도직물 여공들에게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때도 김 추기경 등 천주교 주교단은 ‘사회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내란죄로 세 명의 젊은이가 사형 선고를 받자 김 추기경은 전두환 전 대통령을 면담했고, 그들은 사흘 후 감형됐다.
그래서 더욱 김 추기경에 대한 언론의 추모 열기가 아쉽다. 김 추기경 추모 열기에 대해 적극적인 보도를 하면서도 정작 그가 보여준 삶이 시사하는 바는 외면하고 있어서다.
지금 언론이 진정 김 추기경을 추모하는 일이 무엇일까. 약자들의 시위에 대해 종종 ‘폭도’의 이름을 덧씌우는 것이 아닌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청와대 홍보지침에 묻힌 ‘용산참사’를 제대로 조명하고, 철거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 아닐까.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냈던 김수환 추기경을 ‘제대로’ 기억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