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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인권] 김학웅 변호사 (언론인권센터 언론피해구조본부장)

▲ 김학웅 변호사 / 언론인권센터 언론피해구조본부장
누면서 즐기는 신문 한 장의 여유

내 하루는 일어나자마자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나서 현관에 떨어져 있는 OO일보를 집어 들고 바로 화장실로 직행해서 전 날의 묵은 찌꺼기들을 출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화장실에서 라디오를 듣거나 tv를 보는 건, 좀 이상하잖아). 서평이면 서평, 여행이면 여행, 아이들 공부면 공부. 무엇하나 나무랄 데가 없다. 특히 김윤덕 기자의 ‘줌마병법’은 평범 속에서 찾아내는 탁월한 소재 선택과 맛깔 나는 story telling으로 아저씨인 내가 보면서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 맞아”를 연발할 정도로 언제나 나를 열광하게 한다. 2009. 4. 13. 아침도 - 아 그러고 보니 22년 전 OOO 열사 고문치사사건으로 세상이 한창 민주화의 열기로 고조되었던 그 날 당시 대통령이던 OOO이 호헌조치란 걸 발표했었군. 뭐 그렇다고 해도 이제 와서 내 일상이 달라질 이유도, 필요도 없으니 - 나는 OO일보를 뒤척이며 출산에 매진하고 있었다.

OO일보의 과감하고 용기 있는 실명 / 초상 공개와 김대중 고문의 칼럼

OOO 회장 관련해서는 대문짝만한 사진에 실명을 거론한 기사가 게재되어 있었다. 역시 OO일보! 그런데 34면에 자못 결사항전의 비장미가 느껴지는 김대중 고문의 “조선일보의 명예와 도덕성의 문제”라는 칼럼에 이르자 분위기는 완전 반전! 그 취지는 “장자연 리스트의 조선일보 인사 거론과 관련하여, 어떤 주장이 명백히 규정될 때까지는 실명 보도를 자제하는 언론풍토를 만들어가자”는 것이었다.

▲ 조선일보 4월13일자 34면.
이게 뭐야? 불과 얼마 전 익명보도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연쇄살인범 OOO의 초상 공개에 있어서 경쟁지인 OO일보와 호각지세를 겨루고 기염을 토하여 뭇 언론이 OOO의 초상을 공개할 용기를 주었던 OO일보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나는 OOO의 초상 공개가 표현의 자유와 알권리의 범주에 있다는 취지의 글을 써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피의자/피고인의 인격을 등한시하는 변호사가 아니냐는 의혹을 눈초리를 받아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이게 뭐하는 소리냔 말이다. 나는 어리둥절해 출산도 잊은 채 고민해야 했다. 그러다 불현 듯 깨달음을 얻은 것은 “지금 애 놓고 있냐? 아침밥 빨리 먹고 출근하라”는 아내의 핀잔을 듣는 순간이었다.

그래! 그렇군! OOO리스트에 OO일보 인사가 거론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은밀한 사생활의 문제이고, 설사 그가 OOO과 관련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관련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 관련의 대가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도 않았잖아? 그럼 김대중 고문 얘기대로 추정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되지! 이 얼마나 절묘하고도 심오한 논리란 말인가! 연쇄살인범 OOO, OOO회장은 공적 관심의 대상일뿐더러 OO일보에 의해 사실관계가 이미 확인되었으니 관련자들의 초상을 공개해도 되지만 이건 경우가 완전히 다른 것이었군.

벌거숭이 임금님이 되어 버린 OO일보와 망명도생하는 홍길동
 
두 분 의원님을 제외하고는 OO일보를 OO일보라고 부름에도 불구하고 OO일보가 어떤 언론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는 듯하다. 벌거숭이 임금님이 벌거벗은 걸 누구나 알았으면서도 무엄한 어린아이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니 이제 임금님 스스로가 벌거벗었다는 걸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언론들은 여전히 공손할 뿐이다.

여기서 OO일보가 얻을 수 있는 건 두 가지일 것이다. 만일 두 분 의원님이 명예훼손의 책임을 지게 된다면 그 여세를 몰아 OO일보를 OO일보로 표시한 언론사들을 상대로 명예훼손에 따른 법적 책임을 추가로 물을 수 있을 것이고(“서울 소재 모대학 정모 교수라는 표현도 피해자가 특정된 경우에 해당한다”고 한 판결에 의한다면 비록 익명이라고 하더라도 OOO리스트의 OO일보 인사 관련 보도를 한 다른 언론사들 역시 모두 명예훼손을 범한 게 된다), 명예훼손이 성립하지 않는다 해도 그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는 계속 언론사들이 계속 OO일보로만 표기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

그런데 이 대목에서 불현 듯 호부 호형(呼父呼兄)을 허락받고 망명도생(亡命圖生)하는 홍길동이 떠오르는 건 무슨 이유 때문일까? 아! 가련하고도 가련하구나, 처량하고도 처량하구나,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던 홍길동만큼이나 OO일보를 OO일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 땅의 언론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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