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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환상속의 그대’

|contsmark0|일간지 기자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사람들이 나를 오해하고 있다. 내게 중요한 건 95 퍼센트가 음악이고 5 퍼센트가 메시지다. 의도적인 사회비판이나 저항과 거리가 멀다. ‘교실 이데아’ 가사도 어릴 적부터 느낀 걸 썼을 뿐인데 과대평가 되는 게 오히려 부담스럽다. 이번 앨범도 자아에 관한 거다. 내가 사회비판 쪽으로 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실망할지 모르지만 ‘나 좀 냅둬라’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나는 음악인이지 운동가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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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3|서태지가 부담스러워 하건 말건 간에 나는 그를 ‘오해’할 수밖에 없다. 어떤 의도로 만들었든 간에 일단 세상에 노래를 띄운 이상 듣고 부르는 자의 몫이 따로 있음을 그도 인정해야 한다. 마치 음식을 먹으면서 “이건 좀 짠데” 했다고 해서 조리사가 “넌 나의 의도를 오해하고 있다. 난 결코 짜게 만들지 않았다”라고 대응하는 방식이 이상한 것과 같은 이치다.
|contsmark4|노래를 만든 자 (정확하게는 그 노래를 유통시키려고 계획하고 실행한 자)는 이를테면 자신의 꿈을 세상에 띄운 것이다. 그 꿈에 대해 누군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꿈을 꾼 자보다 더 설득력 있게 그 꿈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꿈꾼 자에게 강요하지 않는 한 꿈의 해석은 자유다. 물론 꿈꾼 자가 그 해석에 대해 억지라고 주장하는 일 또한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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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7|미루어 짐작했겠지만 나는 서태지의 음악적 성과에 대해 관대한 편이다. 아니 터놓고 이야기하자면 찬미 쪽에 가깝다.(그가 부담스럽다고 받아들이는 데 대해 미안한 느낌은 솔직히 없다) 나는 그가 20세기 말에 불현듯 나타난 대단한 젊은이라는 데 기꺼이 동의하고 그를 문화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하고 싶은 욕구를 갖고 있다.
|contsmark8|이런저런 이유로 그가 다시 가요계(어떤 이는 노래시장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노래전쟁터라고도 부르는)에 돌아온다고 선언했을 때 나의 입에선 짧은 탄식이 흘러 나왔다. 그 가쁜 호흡의 정체는 이러하다. “가만히 있으면 신화로 머물 수 있는데 왜 굳이 스스로를 전설로 강등시키려 하는 걸까. 자칫하면 전설도 못 되고 설화나 민담 수준으로 추락할 지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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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11|‘난 알아요’부터 ‘컴백 홈’까지 그의 음악세계는 완결미가 있다. 노랫말의 흐름으로도 그의 탄생과 성장, 소멸의 과정에는 충분히 영웅 신화적 요소가 있다. 영웅은 사회의 핍박 속에서 태어난다. 그를 잉태한 세상은 편견과 분단과 차별로 가득한 세상이다. 그의 중학교 때 사진을 tv는 자주 보여 준다. 좋게 말하면 너무 앞서갔고 나쁘게 말하면 머리 색깔만큼이나 싹수가 노랬다. 그때 그를 만났다면 나 같아도 “정상과는 거리가 있다”라고 판단했을 게 틀림없다. 우리는 그렇게 길들여져 왔다. 그는 그런 세상을 향해 외치고(노래하고) 싶었고 세상은 더 없이 꽉 막혀 있었다. 공고 2학년을 중퇴한 자에게 대한민국의 시선이 너그러울 리 없다. 영웅은 잘못된 세상을 인식하고 그것을 되돌려놓기 위해 먼저 스스로 각성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마침내 세상 속으로 침윤하여 혁명의 메시지를 구가한다. 그리고 사라진다. 이 구도 속에 서태지의 힘찬 행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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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14|데뷔곡 ‘난 알아요’가 자기분열과 인식의 단계라면 ‘환상 속의 그대’는 대오각성과 다짐의 과정이다. 침윤의 과정 (‘하여가’)을 겪은 후 그가 쏜 혁명의 메시지는 크게 보아 3가지다. 성적으로 줄 세우는 획일화의 폭압 속에서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꾼 ‘교실 이데아’와 갈라선 민족의 아픔을 대승적으로 극복하려 한 ‘발해를 꿈꾸며’, 그리고 소외와 해체가 가속화하는 세상을 처음 그 온기대로 되찾자고 외친 ‘컴백홈’이 그것들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할 말 다했다는 듯 미련 없이 떠났다. 거기까지가 영웅신화의 전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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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17|영웅을 신화로 편입시키는 데는 신도들 뿐 아니라 사도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가 미국에 은둔하는 동안 그의 사도들(주로 대중문화계에서 말 깨나 하는 자들)이 그를 잊지 않게 하려고 벌인 노력은 실로 눈물겨웠다. 때마침 세기말이라는 시의성과 맞물려 그는 20세기 빛나는 문화영웅으로 확실히 자리잡았다. 슈퍼스타의 생명력. 그 비밀의 암호는 부흥회보다 전도서와 사도행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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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20|세상에 서태지의 존재를 처음 알린 ‘난 알아요’의 핵심은 그가 이별하고자 했던 대상(스스로는 ‘너‘ 혹은 ‘그대’라고 표현했던)의 정체를 규명하는 일이다. 내가 찾은 해답에 따르면 그대는 바로 서태지 자신이다. 실마리를 찾아보자.
|contsmark21|1.난 정말 그대 그대만을 좋아했어/ 2.나에게 이런 슬픔 안겨주는 그대여/ 3.나에겐 오직 그대만이 전부였잖아/ 4.내 몸 속에 젖어 있는 너의 많은 숨결
|contsmark22|그는 자신을 옭아매는 거추장스런 존재로 자기애에 빠진 자신을 지목했다. 자신과 결별함으로써 비로소 구속에서 해방될 수 있음을 눈치챈 것이다. 지금 결행하지 않으면 영원히 원초적 욕망 속에 갇혀 살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이 행간의 전면에 나타나 있다.
|contsmark23|5.어쨌거나 지금은 너무 늦어 버렸어/ 6.그때 나는 무얼 하고 있었나/ 7.오 그대여 가지 마세요/ 8.나를 정말 떠나가나요
|contsmark24|두 자아 (떠나려는 자아와 붙잡으려는 자아)의 싸움이 힘겹게 펼쳐지는 모습이다. 7과 8은 정신분석학에서 이드(id)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행히 ‘환상 속의 그대’에서는 이드에서 에고(ego)로 옮겨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스무 살의 젊은이답지 않게 그의 현실인식은 엄정하고 단호하다. 인식과 각성, 그리고 다짐이 혼재해 있지만 반성의 문맥은 냉정하고 진지하다.
|contsmark25|1.결코 시간이 멈추어줄 순 없다/ 2.아무도 그대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3.그대는 마음만 대단하다 (그 마음은 위험하다)/ 4.시간은 그대를 위해 멈추어 기다리지 않는다/ 5.그대는 방 한구석에 앉아 쉽게 인생을 얘기하려 한다/ 6.지금 자신의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 7.그대는 새로워야 한다/ 8.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꾸고 새롭게 도전하자
|contsmark26|컵 속의 물만 물인 줄 알았던 이들에게 그는 소낙비도 물이라는 걸 알려 주었다. 스스로에겐 5 퍼센트에 지나지 않았을지 몰라도 그 수퍼에고(superego)의 파괴력은 결코 5 퍼센트에 그치지 않았다. 서태지는 안일하고 안주하려는 삶에 폭포수 같은 물벼락을 쏟아 부었다. “혼탁한 세상을 깨부수겠다”며 주문처럼 외운 말과 소리들이 ‘이대로 살다 죽을래’라고 마음먹은 세기말의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울림으로 다가간 것이다. 그가 비웃듯 (팔짱끼며 몸을 위 아래로 흔들던 그를 떠올려 보라) 던진 말이 비수처럼 내게도 박혀 신음하고 있다.
|contsmark27|“단지 그것뿐인가. 그대가 바라는 그것은.” -‘난 알아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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