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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의 영화이야기]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영화를 보는 행위는 흔히 여행을 떠나는 행위와 비교된다. 대개 2시간 안팎의 시간동안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현실의 고단함과 복잡함을 잊고 환상의 세계로, 추억의 세상으로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말 그대로 영화가 여행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오드리 헵번이 짧은 헤어스타일로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던 로마(로마의 휴일),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이 사랑을 이루는 시애틀(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드넓은 평원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를 감겨주던 멋진 로버트 레드포드가 있던 아프리카 대륙(아웃 오브 아프리카)은 가보지 않았지만 마치 한 번 쯤 어쩌면 전생에 가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책도 마찬가지지만 영화도 간접체험이라는 용도로는 최고의 매체가 아니던가.

그런데 때로는 이런 작품을 보고 간접체험을 하는 것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을 때가 있다. 욕망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떠나고 싶은 욕망이 스멀스멀 혹은 불쑥불쑥 솟아올라 주체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여기 미국에서 바르셀로나로 여행을 떠난 두 여자가 있다. 안정적인 삶을 꿈꾸는 비키는 재미는 좀 덜하지만 성실하고 능력 있는 약혼남과 결혼을 앞두고 있다. 인생에서 뭐 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크리스티나는 방금 단편영화 한 편을 끝냈지만 재능이 없고 하고 싶은 일도 딱히 없어 고민이다.

▲ 영화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Vicky Cristina Barcelona, 2008)
이 두 친구가 바르셀로나로 여행을 떠나 현지에서 만난 후안이라는 남자에게 빠져 버리게 된다는 이야기는 이후 후안의 전처까지 등장하면서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줄거리만 들어서는 당최 발칙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는 1시간 40분 동안 내내 낄낄대게 하더니 은근히 삶과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일흔이 넘은 우디 앨런, 이 양반은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재치와 깜찍함이 샘솟는걸까!

우디 앨런은 원래 뉴욕의 감독이었다. 뉴욕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학교를 다녔고 감독이 된 후에는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줄곧 찍었다. 그의 영화 속에서 뉴욕은 매력적이었고 빛났다. 그랬던 우디 앨런이 어느 샌가 영국으로 프랑스로 배경을 옮겨 영화를 찍더니 이번에는 바르셀로나다. 원래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했던 이야기는 바르셀로나시에서 제작지원을 하겠다는 제안에 배경을 바꿨다는데 100만 달러인지 얼마인지 받은 지원액을 모두 갚고도 남을 만큼의 일을 해냈다.

제목만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가 아니라 주인공들이 대화하고 식사하고 사랑을 나누며 누비는 도시의 관광지 곳곳은 콧소리 가득한 여성 보컬의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하는 배경음악과 함께 자유, 예술, 사랑의 분위기를 연신 풍기며 코끝을 간질인다. 특히 후안의 작업실(후안은 화가다)겸 집의 뜰에 있는 파라솔에서 여유롭게 와인을 곁들인 식사를 하면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반복되자 결국엔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하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 나도 스페인의 저택 뜰에서 와인 한 잔에 후안같은 느끼한 남자와 끈적끈적한 이야기 나누고 싶어라! 
 
필자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이주연의 영화음악〉의 청취자중 한 명은 재작년 말에 상영됐던 아일랜드 영화 〈원스〉(once)를 보고 푹 빠져 결국 작년에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여행을 떠났다. 주인공이 울부짖으며 노래하던 거리하며 돈을 훔쳐간 소매치기를 따라가 잡던 공원, 그리고 주인공의 집으로 나왔던 전자기기 수리점까지 모두 둘러보고 온 그녀는 주인공들의 노래를 직접 듣고 싶었던 차에 올해 초 내한공연 온 그들을 무대에서 만나고는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을 느꼈다했다. 그들을 찾아 아일랜드까지 다녀온 그녀가 그 음악을 눈앞에서 듣고 느꼈을 감동은 얼마나 충분했을까.

▲ MBC FM <이주연의 영화음악> 진행자, 이주연 아나운서
영화는 스크린에서 세상을 보여주지만 때로 스크린 밖 세상으로 나가라고 등을 떠밀기도 한다. 현실 때문에, 돈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머뭇거리는 사이 벚꽃은 지고 바람은 가버리고 해는 넘어간다. 떠나는 자만이 돌아올 수 있다. 어딘가 꿈꾸는 자만이 떠날 수 있다. 그래도 여건이 안 될 때? 그때는 영화를 보며 두 시간짜리 짧은 여행을 떠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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