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는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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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이성규 독립PD

주관을 완전히 배제한 객관은 존재할까?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면서 늘 갖게 되는 의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주관을 배제한 채 객관에 가까이 가려고 하는 노력은 가능하나, 완전한 객관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메멘토>를 기억하는가?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가 등장하는 <메멘토>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다” 이 말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현실의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다.” 

구로자와 아끼라 감독의 <라쇼몽>에서 우리는 같은 상황을 놓고도 각기 다른 진술이 전개되는 것을 스크린을 통해 목격했다.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등장한다. 인간이 지닌 기억과 경험은 진실이 아닌 해석이다. 각각의 개인은 사실에 바탕을 둔 진실이라고 진술하고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 드러나는 것은 각각의 해석이다. 단지 자신의 기억 속에서 굴절된 순간을 ‘사실’이라고 믿음으로써, ‘진실’의 프레임 안에 넣는 것이다. 같은 다큐멘터리를 보고도 제 각각 해석이 다른 이유도 거기에 기인한다.

▲ 영화 '워낭소리' ⓒ인디스토리
한국의 영화사에서 최대 이변으로 기록될 영화 <워낭소리>에 대해서 말이 많다. 혹자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라고 단정 지어 말한다. 누구는 ‘다큐멘터리가 맞지만, 사실과 진실의 기록인 다큐멘터리의 윤리적 영역을 넘어섰다’고 비평한다. 대중적 소통에는 성공했더라도 다큐멘터리로서의 진정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워낭소리’가 적극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스토리텔링, 드라마타이즈 기법을 문제 삼는다. 다큐멘터리는 현장의 구성보다 현장의 포착이 중요하며, 촬영과정이나 방식 또한 다큐멘터리적(?)이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지적을 하는 이들에게 필자는 다이렉트 시네마 그리고 시네마 베리테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다큐멘터리역사를 다시 읽어볼 것을 권유한다. 물론 영화 <메멘토>도 함께 말이다.

다큐멘터리를 시대와 현장의 기록으로 해석하는 입장에서만 보면, <워낭소리>가 갖는 서술 구조에 대한 비판이 따를 수 있다고 본다. 다큐멘터리를 현장의 꾸밈없는 날 것으로만 인지하는 관객들 가운데 상당수는 실제로 이런 의문을 던지기도 했다. 클로즈업된 소가 할아버지를 보고 눈물 흘리는데, 실제 소가 그 장면에서 운 게 맞느냐는 것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시위대 앞을 지나는 장면도 감독의 주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실제 ‘워낭소리’에는 사운드·이미지·편집에 의한 감독의 의도적인 구성이 곳곳에서 보인다. 영화 내내 워낭소리가 깔리고, 현장음 대신 새·벌레소리가 녹음실에서 효과음으로 들어갔다. 극중 시간도 앞뒤가 뒤섞여 있다. 그러나 이를 과도한 연출, 사실의 왜곡으로 보는 시각은 지나친 근본주의다. 

▲ 이성규 독립PD

다큐멘터리는 기본적으로 비허구에 바탕을 둔 영상물이다. <워낭소리>는 잊혀져가는 시골의 기억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감독 자신이 가슴 속 깊이 간직한 시골의 기억을 그려낸 영상 해석이다. 사적 기억에 의한 다큐멘터리다. 중요한 것은 <워낭소리>가 인간적 가치와 연대의 소중함이라는 보편적 메시지를 정교한 연출을 통해 효과적으로 담아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대박나면서 드러난, 노스텔지어 과소비 현상에 대한 우려와 지적은 일정 타당하다. 사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감독이 생각지도 못했던 대중의 해석과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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