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20 과잉진압 논란 왜곡한 ‘동아일보’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글로벌] 런던=장정훈 통신원

지난 4월 1일, G20 정상회담이 열리는 가운데 시위가 한참인 ‘더 씨티’ 한복판에 있었다. Bank of England(영란은행) 앞을 가득 메운 시위대는 한줌도 안 되는 경찰들의 봉쇄로 사방이 가로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돼 있었다.

경찰은 시위대의 숫자에 비하면 정말 ‘한줌’도 안됐다. 그냥 ‘확’ 밀어버리면 ‘뻥’ 뚫리고 말 터인데도 시위대는 그 ‘한줌’의 경찰들이 몸으로 펼치고 있는 봉쇄망 안에 갇혀 예정된 가두 행진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삼삼오오 짝을 진 경찰들이 시위대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지만 시위대와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봉쇄망 속에 갇혀버린 시위대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하고, 노래를 하기도 하고, 도시락을 먹기도 하면서 마치 길거리 축제에라도 나온 듯 자유롭게 웃고 떠들었다.

▲ 지난 4월 1일 G20 정상회담이 열리는 도중 영국 영란은행 앞에서 시위를 벌였던 시위대의 모습.
그렇게 여러 시간이 흘렀다. 경찰은 봉쇄망을 풀었다, 다시 만들었다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에 경찰의 봉쇄망을 빠져나온 시위대들이 경찰들의 뒤쪽에 서면서 마치 한줌의 경찰을 엄청난 숫자의 시위대가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 됐다. 그렇지만 여전히 큰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치선에서 충돌이 일면 후방의 경찰들이 시위대를 뚫고 들어와 지원을 하고 다시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시위대는 후방의 경찰이 들어와 문제가 된 시위대원을 체포해 가거나 할 때 야유를 퍼 부으며 먹던 사과나 음료수병을 집어 던지는 것으로 최소한의 항의를 표시했다. 경찰과 시위대 모두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음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고 그 선을 넘을 경우 어떤 사태가 닥칠지 분명히 알고 있는 듯 했다. 경찰이 시위대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나 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자신감이 없었다면 그런 진압 방식을 택할 리 없을 터였다.

좀 더 많은 시간이 흐르자 시위대의 숫자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경찰은 봉쇄망을 좁히며 시위대의 해산을 종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양측 간 오랜 시간 억눌러 온 인내심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경찰과 시위대간에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공무를 집행하는 경찰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시위대의 자극에 자제력을 잃은 일부 경찰들이 몽둥이를 휘둘렀고, 몸과 방패로 시위대를 밀어 넘어뜨렸다.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르는 시위대의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 즈음되면 몽둥이와 방패로 무장한 경찰을 맨몸의 시위대가 당해낼 수는 없다. 아니 시위대는 최소한의 저항만 할뿐 당해내려 하지도 않고 있었다.

각국의 정상들이 런던을 떠난 후에도 영국의 미디어는 끝내 폭력으로 얼룩지고 만 그날 ‘더 씨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까지도(보수, 진보 구별 없이) 각 언론사의 웹사이트는 경찰의 과잉 진압을 보여주는 기사와 동영상을 올려놓고 있다. 시위가 있던 날 현장엔 시위대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카메라가 등장했다. 시위대는 매순간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디카와 폰카를 들이대고, 경찰은 경찰대로 곳곳에 카메라 인력을 배치해 동영상과 스틸카메라로 현장을 채증하고 있었다. 디지털은 시위현장에서도 그렇게 맹활약하고 있었고 그 결과물은 방송과 언론사 웹사이트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졌다. 그 힘은? 동영상에 찍힌 수많은 경찰들이 독립수사기관(Independent Police Complaints Commission)의 수사를 받고, 징계를 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치인들은 야당과 여당 가릴 것 없이 경찰의 과격 진압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폭력 앞엔 진보도, 보수도 없고, 여도 야도 없다. 모두 나서서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는 게 상식이다. 그래야 시위대건, 경찰이건 폭력을 자제하지 않겠는가?

▲ 동아일보 4월6일자 31면.
최근 우연히 보게 된 <동아일보> 송평인 파리 특파원의 칼럼은 필자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폭력시위, 씨도 안 먹히는 영국’이라는 제목의 칼럼. 그날 그곳에 있었다는 그 특파원은 “경찰의 곤봉에 맞아 피를 철철 흘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TV를 통해 방송 되었지만 대부분의 현지 신문이 곤봉에 맞아 깨진 폭력시위대의 머리를 문제 삼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면서 영국법에는 시위권이 없다는 주장까지 한다. 영국의 언론은 시위대의 깨진 머리를 문제 삼아 상세히 보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찰은 독립수사기관의 수사를 받고 있다는 것까지 보도하고 있다. 영국의 법은 명백히 시위를 보장하고 있으며, 시위의 중요성과 역사적 성과까지 강조하고 있다. 시위를 법으로 보장하지 않는 나라가 있다니, 그것도 민주주의의 발상지라는 영국이 그렇다니…. 믿을 수 없다.

▲ 런던=장정훈 통신원 / KBNe-UK 대표
폭력적인 시위가 정당화 될 수는 없다. 하지만 폭력시위를 유발하는 행위도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자제력을 잃은 경찰의 폭력진압도 용납될 수 없다. 영국의 언론은 그 점을 명확하게 짚고 있고, 경찰도, 정치권도 그런 언론의 지적이 그르지 않음을 인정하고 있다. 착하디 착하게 생겼던 한 영국 경찰이 생각난다. 경찰의 봉쇄망을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영국내무부가 인정한 프레스카드가 있으면 됐다. 프레스 카드를 소유하고 있는 필자는 그날 그 자리에서 언제든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렇지만 프레스카드가 없는 동료를 혼자 두고 나올 수 없었던 난 경찰의 봉쇄를 이해할 수 없다며 항의 했고, 흥분한 상태에서 경찰을 밀치다 체포됐다. 수갑을 차고 경찰차에 실린 내가 잠시 후 진정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 경찰은 차근차근 상황을 이야기 하면서 내가 흥분을 가라앉힌 것 같으니 이제 돌아가도 좋다고 하며 수갑을 풀어줬다. 그 정도면 아무리 경찰이라도 인간적이지 않은가? 그가 집행한건 나쁜 폭력이 아니고 착한 공무였다. 단호히 대처하고 다 잡아 가두겠다고 겁주는 그런 모습이 아닌….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