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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드릭스의 책읽기] (16) 런던 코뮌

▲ 영화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 2000)
영국 영화 제작사 워킹 타이틀의 명작 〈빌리 엘리어트〉는 대처리즘의 절정기인 1984년 광부노조 파업이라는 현장의 분위기를 정확하게 묘사한다. 19세기 맑스의 시절부터 축적된 빛나는 영국 노동자들의 전통은 대처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발레리노가 되겠다는 아이를 바라보는 아빠의 시선에는 노동계급의 패배라는 음울함이 묻어있다. 이명박의 시대. 며칠 전 대한통운의 박종태라는 노동자가 목숨을 끊었다. 이랜드 노동자들과 기륭전자의 노동자들이 파업과 단식으로 최소한의 ‘고용’에 대한 권리를 요구했다. 수많은 이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저항하지만 정권의 입장을 바꿀 것 같지는 않다. 기도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는 한 번도 손쉽게 권력자가 모든 것을 장악하던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거기에는 언제나 저항의 흔적이 있다. 심지어 대처리즘의 전성기인 1980년대에도 말이다. 서영표의 〈런던코뮌〉은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1981년 지방선거에서 영국 노동당은 49석을 얻어 보수당(41석), 자유당(1석)을 꺾고 런던시 의회를 장악한다. 런던 시장이 된 노동당의 켄 리빙스턴은 “대처 정부를 끌어내리기 위한 공개적 캠페인의 기지”로 런던을 활용하겠다고 공언한다. 1981년 5월 28일 〈런던 레이버 브리핑〉은 “런던은 우리의 것”이라 말한다. 대처의 강력한 시장주의 선전이 판을 치던 순간에 영국의 심장이던 런던에서 사회주의자 켄 리빙스턴이 시장이 된 것이다. 이를테면 이명박 정부에서 서울 시장으로 노회찬이 된 것과 마찬가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국가 안에서 국가에 대항’하고 ‘시장 안에서 시장에 대항’하는 지방정부가 생긴 것이다(p.188). 그들은 사회주의자에게 씌워진 원죄를 정확하게 이해했다. 소련으로 대표되는 현실사회주의국가들의 관료제와 민주주의의 결핍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었다. 그렇기 때문에 리빙스턴의 런던은 “장기적인 계획, 신기술의 적용, 대중의 참여”라는 원칙을 통해 대처 정부에 대항했다. 관료들이 아니라, 지역에서의 이익에 관련된 이해당사자인 시민들이 협의할 수 있는 공간을 여는 것이 그래서 중요했다.

▲ 〈런던 코뮌〉(서영표, 이매진, 2009)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단순히 대중의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대중을 옥죄는 여러 가지 환경들과 연관이 되어있다. 이를테면 노동의 문제와 육아 문제, 교육 문제가 함께 복합적으로 관련되어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함께’ 해결하려 했고 그것들은 런던시의 구체적인 정책이 되었다. 대중들은 ‘거대한 나라의 정치’가 아니라 자신들의 피부에 와 닿는 ‘필요’와 연관된 문제들이었기 때문에 참여의 열기는 뜨거웠다.

런던 시의회는 취업훈련을 재정적으로 보조했고, 공공 탁아시설을 만들었고, 대중교통 요금을 할인했다. 2005년 이명박 서울시장이 도입했던 대중교통 환승할인도 사실은 런던시가 1983년 3월 시행했던 ‘티켓 하나로(Just The Ticket)’ 정책이 시초다. 또 영국 전체를 뒤흔들던 공공부문의 구조조정의 순간에서 오히려 ‘일자리’를 방어했다. 그리고 일자리에 대한 정책은 순전히 공공부문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런던의 사기업들에게도 적용되었다. 경기침체와 만성적인 산업부문의 위기의 순간에 런던 시의회는 ‘이윤이 아닌 사회적 기준’(p.193)을 만족시키는 기업에게 시의회가 만들어 낸 비영리 투자은행인 ‘런던 기업위원회’를 통해 저리의 대출을 제공했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면 자연히 해결될 거라는 것이 순전히 ‘믿음’임을 리빙스턴의 런던시는 보여주었다. 시장은 공공영역에 의해 통제되었고 그것은 소련식의 ‘당’ 관료의 통치가 아니라 능동적인 시민들의 통치였다. 또한 런던 시민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조건들을 만들어가는 실험은 그 자체로 관료제에서 빠져나와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대처에게 영국의 수도 런던은 가장 적대적인 사회주의자의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대처는 이러한 흐름이 두려워 보수당 다수의 의회에서 1986년 지방세 상한제를 도입하고, 런던과 6개 대도시 의회를 폐지해 버린다. 자신이 독재자라고 낙인찍히는 것보다 당장의 사회주의자들의 수도가 무서웠던 것이다.

▲ 헨드릭스/ 블로거
결과적으로 리빙스턴과 영국 노동당 사회주의자들의 런던 사회주의 실험은 5년 천하로 끝나고 영국은 다시 보수적인 정부가 통치하는 사회가 되었다. 하지만 지역에서의 지역주민들과 공동체들에서 헌신했던 활동가들의 ‘정치의 기억’은 계속 남아있다. 극우파 정부가 중앙을 장악하지만 공산당-사민당이 여전히 지역의 수권을 놓지 않고 있는 일본에서 새로운 대안들이 최근 여러 각도에서 나오고 있다는 점도 떠오른다. 가장 밀착해있는 정책의 ‘실천’을 통해서 보수적인 사회구조를 뚫고 ‘지방 정치의 영역’을 점유했던 영국의 시도를 보면서 2010년 한국의 지방선거가 떠오른다. 새로운 대안이 제출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지역에서의 활동에서 시작될 수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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