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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의 ‘혜화동’

|contsmark0|“오늘은 잊고 지내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네/
|contsmark1|내일이면 멀리 떠나간다고/
|contsmark2|어릴 적 함께 뛰놀던 골목길에서 만나자 하네/
|contsmark3|내일이면 아주 멀리 간다고/
|contsmark4|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찾아가는 그 길/
|contsmark5|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
|contsmark6|-김창기 작사, 작곡, 동물원 노래 ‘혜화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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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13|동물원의 김창기가 새로 나온 cd 하나를 내게 선물했는데 표지에 ‘하강의 미학’이라고 씌어 있었다. 평소 그의 노래 중에 ‘혜화동’을 좋아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는 여전히 혜화동 주변을 헤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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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20|“혜화동 언덕 위에 하얗게 눈이 내리면/
|contsmark21|친구들과 썰매를 타고/
|contsmark22|저 멀리 로터리까지 신나게 내려갔었지”
|contsmark23|-김창기 작사, 작곡 ‘하강의 미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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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30|동물원의 노래들은 과거에 내가 어떻게 살았고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환기시켜 준다.
|contsmark31|어릴 적 나는 돈암동에서 살았는데 혜화동에 가려면 전차를 타야 했다. 혜화동 다음 정거장이 창경원이었는데 거기에 바로 동물원이 있었다. 일년에 한 번 정도 동물원에 가 본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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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34|동물원에는 두 종류의 동물들이 있다. 하나는 거기 잡혀 오기 전 마음껏 뛰놀던 벌판을 그리워하며 우수에 젖어 사는 무리들이다. 아프리카에서 뛰놀던 추억을 상기하며 분노와 허탈감으로 쇠창살을 노려본다. 또 하나의 무리는 쉽게 현실을 인정하고 ‘이렇게 살다 죽기로’ 결심한 동물들이다. 그들은 조련사와 화해하고 그들이 던져 주는 먹이에 감사하며 꼬리를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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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37|인간에게는 특별하게 음악기(music stage ?)라는 게 있지 않나 싶다. 프로이드가 인간의 성장과정을 무엇에 집착하느냐에 따라 항문기, 구순기 등으로 나눈 데서 착안한 이름이다. 살면서 유난히 음악에 집착하는 시기가 분명히 있다. 대개는 누군가를 그리워하기 시작하는 때와 함께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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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40|사랑 노래가 많은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음악기를 지나 생활기 혹은 생존기에 이르면 비로소 음악도시(노래마을)에서 탈출한다. 그러나 그 뜨거웠던 시절의 노래만큼은 늘 가슴에 묻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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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43|한국의 사십대에게 그 뜨거웠던 시기는 통기타와 함께 찾아왔다. 송창식이 부르는 ‘나의 기타 이야기’에 그때의 정서가 녹아 있다. (“딩동댕 울리는 나의 기타는/나의 지난 날의 사랑 이야기/아름답고 철모르던 지난 날의 슬픈 이야기”)
|contsmark44|‘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던 시절이 그들에겐 있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던’ 시절이었다.
|contsmark45|그 시절에 삼등 완행열차를 타고 동해바다로 고래를 잡으러 떠난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은 과연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를 만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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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48|70년대에 젊음을 앓았던 사람들의 공간심상은 바다와 광야에 맞닿아 있다. 김민기가 ‘아침이슬’에서 서러움 모두 버리고 떠나는 곳은 ‘저 거친 광야’이다. 한대수가 ‘청춘과 유혹의 뒷장을 넘기고’ 함께 떠나고 싶어했던 ‘행복의 나라’ 역시 푸른 하늘과 넓은 광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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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51|80년대 들어서도 여전히 ‘찢기는 가슴 안고’ 살아야 했던 이 땅의 젊은이들은 여전히 그 광야에 다시 서고자 했지만 다른 한쪽에선 ‘밤비 내리는 영동교’를 지나 ‘신사동 그 사람’을 만나러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광야나 바다로도 못 가고 영동교를 지나 신사동으로도 갈 수 없었던 젊은이들이 바로 혜화동을 지나 동물원이 있는 창경원으로 향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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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54|김창기의 노래와 함께 혜화동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고개를 드니 신문 한쪽에 낯익은 얼굴들이 몰려 있다.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그리고 양희은이 한 무대에서 공연을 한다는 소식이었다. 트윈 폴리오. 아마 이 땅의 사십대에게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이름일 것이다. ‘하얀 손수건’ ‘축제의 밤‘ ‘웨딩 케익’ 등의 노랫말이 지금도 눈과 귀에 밟힌다. 사람들은 노래를 들으며 자란다. 우리는 그들의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며 자랐다. 책은 펼쳐야 비로소 책이지만 노래는 다르다. 그것들은 무차별적으로 다가와 잠자는 우리의 정서를 낚아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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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57|미국에서 피터 폴 앤 매리의 공연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노래는 여전했지만 그들은 이미 할아버지, 할머니였다. 무대 위에 선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양희은을 지켜보며 아마도 소리 죽여 우는 소리가 객석에서 들릴 것만 같다. 그들이 늙은 걸 보며 놓치거나 지나쳐버린 음악기(순수의 시대)를 못내 아쉬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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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60|혜화동엔 전차가 없고 창경원에는 동물원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때 스스로를 불질렀던 젊은이들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전차와 동물들이 소리와 그림으로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고 현실은 초라하지만 추억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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