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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PD 구보씨의 일일]

▲ 이응진 KBS 드라마국장 ⓒPD저널
80년 초. 나는 TV를 보다가 외쳤다. “어, 텔레비전에서도 예술하네?”

늦은 밤 TV 문학관 〈삼포 가는 길〉을 보고 나서였다. 그 후 나는 운 좋게 방송사에 입사해 드라마 PD가 되었고 그 예술 당사자를 만났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81년 봄, 방송국이 통폐합 된 다음해다. 여의도 〈5.16광장〉엔 ‘국풍81’이 열리고 꽹과리 소리에 추임새가 뒤따랐지만 모든 이의 어깻죽지들은 시들어있던 시절이다.

KBS 드라마국은 합병된 TBC 건물로 이사를 갓 한 상태였다. 빌딩 앞 화단에는 옛 주인이 심었다는 영산홍이 한에 겨워 피라도 토한 듯 벌겋게 피었고, 별관 2층 복도엔 전설적인 드라마 〈여로〉를 쓰고 연출한 이남섭 선생이 머리엔 까치집을 얹고 덥수룩하게 수염 난 얼굴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는 탤런트이며 아내인 김난영씨가 세상을 떠나자 곧 뒤따라 아내 곁으로 갔다. 1986년으로 기억된다. 여기에 그의 이름을 꺼내는 것은 누군가 이 난에 그 비운의 천재연출가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기를 바라서이다.)

TBC와 KBS PD들은 기름과 물처럼 서로 섞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강제로 접목된 조직이고 인력이다 보니 사무실은 을씨년스러웠고 사람들은 당구장으로 다방으로 부유하고 있었다. 양 진영이 만들었던 드라마들을 떠올려도 당연했다.

KBS 〈실화극장〉, 〈전우〉, 〈꿈나무〉 〈꽃피는 팔도강산〉. TBC 〈아씨〉, 〈청실홍실〉, 〈임금님의 첫사랑〉. 그렇게 따로따로였을 때 그가 나타났다. 그는 유령 같았다. 이름만 별관 구석구석을 떠다닐 뿐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없는 시공간에서도 이름만큼은 한강처럼 회자되었다. 그렇게 궁금증이 더해가던 날 그가 안 보이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자신이 만든 작품이 심의에서 방송 불가판정이 나자 불복해서 잠적해 버렸다는 것이다. 선우휘선생의 소설을 극화한 TV문학관 〈단독강화〉(單獨講和)였다.

〈단독강화〉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 낙오한 국군과 인민군의 이야기이다. 서로를 불신하던 두 사람은 둘만의 ‘단독강화’를 맺고 동굴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 문제가 된 것은 인민군과 국군이 풍기는 느낌이었다. 각박한 도시생활을 하다 징집된 국군병사는 매사를 불신했고, 촌스런 인민군은 상대적으로 단순, 순진한 인물이었다. 당시의 이분법적 잣대로 보면 ‘착한 인민군’과 ‘안 착한 국군’으로 비치기 십상이었다. 감독의 의도는 ‘남과 북’이라는 고착된 이데올로기적 2분법을 탈피해 인간과 민족에 관한 탐구였지만 심의의 잣대는 엉뚱했다.

방송 불가 판정이 내려지자 그는 사표를 내고 출근하지 않았다. 회사는 사표를 반려했다. 그의 잠적은 길어졌고 회사의 인내도 길어졌다. 한 달, 두 달…. 그러던 어느 날 그가 했다는 말 한마디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들려왔다.

“내 작품이 방송이 불가하면 제 퇴직금으로 그것을 사겠소.”

▲ KBS TV문학관 <길 위의 날들> ⓒKBS
PD의 작품에 대한 신념과 열정, 사랑과 겸손을 이 말보다 더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 말이 떠돈 이후 회사와 PD는 강화를 맺었고 〈단독강화〉는 얼마 후에 방송되었다. 그가 바로 김홍종 선배다. 그는 〈단독강화〉외에도 〈삼포 가는 길〉, 〈사람의 아들〉, 〈광장〉, 〈소리의 빛〉 같은 수많은 대표작을 남긴 PD다. 그가 복귀했을 때 처음 본 인상은 그를 둘러싸고 떠돌던 소문들과 너무나 닮아있었다. 함께 일하는 배우는 촬영이 끝나는 날까지 분장을 지우지 못했다. 밤에 술을 마시다 들키면 다음날 빈 카메라를 돌려 생고생을 시켰다.

1987년, 소설가 박완서 선생을 만났을 때 선생은 선배의 안부를 물어보며 말했다. “그이는 소설을 쓴 나보다도 내 소설에 대해 더 많이 아는 거 같았어요.” 처음에는 비아냥거리는 말쯤으로 알아들을 뻔했다. 그러나 10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이태리 땅에서 그 말뜻을 몸으로 느꼈다. 1997년, 나는 선배 때문에 400명의 유럽인들 앞에서 우쭐댈 수 있었다. 저 유명한 볼로냐 교향악단이 나를 세워놓고 축하 연주를 했고 유럽의 내로라하는 방송인들이 그 장중한 연주를 배경으로 기립박수를 쳤다. 선배가 만든 TV문학관 〈길 위의 날들〉 이 ‘PRIX ITALIA 페스티벌’에서 아시아 최초로 대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페스티벌의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다가 그가 받을 트로피를 가슴에 안았다. 1997년 가을, 이탈리아 해안도시 라베나에서 한국 드라마역사에 금자탑이 서는 순간이었다.

작품을 만들 때 그를 지켜보노라면 〈삼포 가는 길〉 속의 세주인공 ‘영달’과 ‘정씨’와 작부 ‘백화’처럼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삼포’를 찾아가는 사람 같았다. 천하 명약을 만드는 명의마냥 아홉 번씩 찌고 아홉 번씩 볶는 구증구포(九蒸九曝)의 자세로 하동지동 드라마를 쫓아가던 그. 세상에 깃들지 못하고 영원히 하늘을 날아야 하는 새, 그러나 〈드라마〉를 짝으로 만나 비익조(比翼鳥)가 된 내 푯대. 김홍종 선배에게 대표작이 뭐냐고 물어보면 그는 씩 웃으며 ‘차기작’이라 말할 사람이다.

※ 이 글은 이응진 PD 블로그에 실린 글입니다. [이응진 PD 블로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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