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판타지에 기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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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판타지에 기대야 할까
[방송따져보기] 조민준 〈한겨레〉 ‘ESC’팀 객원기자
  • 조민준 〈한겨레〉 ‘ESC’팀 객원기자
  • 승인 2009.06.10 15: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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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다. 그 빛을 가르고 공중으로 떠오르는 자주색의 알 하나. 곁에 있던 신녀 서리(송옥숙)가 이를 지켜보던 단상의 사내에게 말한다. “이제 혁거세님의 알과 친히 접신하시옵소서.” 단상에서 알을 들어 올린 이는 ‘폐하’라는 극존칭을 얻는다. MBC 월화 드라마 〈선덕여왕〉 제1화에서 묘사한 신라 제25대 임금 진지왕의 즉위식이다. 고려 이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이처럼 판타지적인 장면들을 만나는 것은 어느덧 낯설지 않은 일이 되었다. 〈주몽〉의 ‘3종 신기’부터 〈태왕사신기〉의 ‘네 가지 신물’까지.

물론 나름의 이유들도 있다. 삼국시대 무렵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들은 그리 풍부하지 못하며, 그 얼마 되지 않은 기록들 중에는 초자연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비유 혹은 상징에 불과하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오늘날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아무도 없을 텐데 우리의 사극들은 그 비유를 현실로 여기고 화면으로 고증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셈이다.

▲ MBC <선덕여왕>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먼저 이러한 판타지들이 지시하는 것은 운명론의 세계관이다.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에 등장하는 상고시대의 인물들은 대체로 이 하늘의 점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이 신녀의 예언이건, 북두팔성의 징조이건. 하여 이 같은 판타지를 내세운 사극들은 역사나 인간의 이야기보다 신화적인 설정이나 전제를 동력으로 움직이게 된다. 하지만, 과연 주몽, 광개토대왕, 선덕여왕과 같은 인물들은 ‘하늘’의 후광이 없이는 영웅적인 인물로 묘사하기 어려운 존재들일까.

이처럼 운명론을 따르는 극작술은 또한 고증의 문제로도 이어진다. 하늘의 힘까지 빌려 온 주인공의 우상화는 피치 못할 역사 왜곡 논란을 낳는다. 현재 방영중인 〈선덕여왕〉 또한 예외가 아니다. 사극 드라마도 어차피 픽션이니만큼 가공의 이야기들이 가미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려스러운 것은 그 픽션의 내용이 아니라 방법론이다. 역사라는 기반을 확고하게 둔 채로 픽션을 가미하는 것이 아니라 픽션을 우선에 두고 역사를 끼워 맞추는 듯한 시도들은 극중 세계의 일관성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다. 일본과 중국, 심지어 서양의 무협·판타지물의 아이템들과 그리 거리가 멀어 보이지 않는 미술과 의상은 언제든지 ‘어디까지나 픽션일 뿐’ 혹은 ‘자료가 충분하지 못하여’라는 핑계와 함께 도망가기 위한 변명거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많은 경우 사극에서 판타지와 픽션은 편의주의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장르의 기반이 취약한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 서사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직 우리는 상고시대의 한반도를 배경으로 한 완전한 판타지도, 완전한 시대극도 만난 기억이 없다. 〈태왕사신기〉가 그나마 판타지로서는 무결한 일관성을 갖춘 모습을 선보였으나 역사 컨텍스트와의 무리한 결합은 그 일관성을 도리어 해치는 결과를 낳았다. 본격적으로 픽션의 세계를 그리고 싶다면 진짜 판타지를, 시대극에 포커스를 맞추고 싶다면 사료의 해석에 심혈을 기울일 일이다.

▲ 조민준 〈한겨레〉 ‘ESC’팀 객원기자

우리가 진정으로 ‘사극’에서 보고 싶은 것은 비유적인 묘사의 판타지적인 해석이 아니라 그 비유에 숨겨진 현실과 인간의 모습인 까닭이다. 이러한 사극의 기반이 공고해졌을 때, 그리고 판타지와 사극의 분리가 가능해졌을 때야말로 우리는 한국의 사극들의 새로운 ‘퓨전’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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