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와 처벌’의 복귀, 전근대의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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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세상읽기]

▲ 우석훈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88만원 세대 저자)
한국 사회에도 포스터 모더니즘에 관한 논의가 맹타한 적이 있었다. 불과 10년 전의 일이다. 우리에게는 ‘근대’라는 질문은 언제나 묵직하지만, 후기 근대라고 할 수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의는 명랑하고 발칙한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의 어두운 과거를 잠시 잊을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근대는 어두운 기억이고, 또한 단절의 기억이다. 그리고 식민지의 기억과 엉키면서 주도적이지 않았고, 자기발생적이지 않았다는 아픔들이 있다.

그런데 이런 한국에 90년대 발생한 포스터 모더니즘에 대한 논의는 ‘근대화’라는, 우리가 언젠가 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던 그것이 우리도 모르던 사이에 벌써 끝났고, 이제 근대가 만들어낸 폐해들을 ‘해체’하고 포스트모던으로 가야한다는 그런 흐름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근대에 대한 논의는 요즘 박명림 선생과 김상봉 선생이 경향신문에서 계속하는 용어대로라면 ‘공화국 논의’를 접어두었고, 데리다의 해체로 시작되는 탈근대 논의를 열심히 했었다. 과연 우리의 근대는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에게 근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논의는 최소한 지난 10년간 재미있는 논의는 아니었다. 하버마스의 ‘소통 이론’에 대한 논의도 아주 짧게 하고, 우리는 하버마스도 넘고, 헤겔도 넘고, 마르크스도 넘고, 푸코를 거쳐 데리다의 사회에 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왔다. 최근 이명박 정부의 특징을 ‘소통 부재’라고 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물론 이 특별한 정부에 소통이라는 것은 없다. 전형적인 가부장적 소통이 바로 대통령이 우리에게 보내주는 소통인데, 너희들이 떠들면 내가 보고 종합적인 판단을 내리겠다는 가부장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결국 가장이 돈을 벌어와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데, 나머지 식구들은 모두 피부양자의 입장에 있고 여성들과 아이들의 말을 무시하듯 지금의 정부 구조는 그렇게 되어있다.

그리고 임명한지 1년 만에 공공기관장에 대한 평가와 해임 혹은 경고를 했다. 이것은 ‘쇄신’이라는 말로 포장되어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푸코가 얘기한 ‘감시와 처벌’, 그야말로 근대국가가 보여주었던 대중들을 통제하는 방식 바로 그것이 아닌가? 국가가 감시하는 존재라고는 하지만 탈근대 시대의 국가는 국가 그 자체가 해체의 대상이고, 국가의 폭력성은 역사 속에서 해소되어야 할 대상인 셈이었다. 한국의 지성은 지난 10년 동안 한국이 근대화를 살짝 넘어서면서 경제적 성공으로 이 단계가 ‘압축적’으로 지나간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 6월 30일 경향신문 11면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한국의 현실은 ‘감시와 처벌’의 복귀, 그것도 아주 화려한 복귀이다. 지금 검찰의 이메일 공개를 통해 보고 있는 것은 “잘못하면 맞는다”라는 감시가 실정법상의 행위가 아니라 개개인의 정신세계를 감시하는 국면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닌가? 지금 소통의 부재가 문제가 아니다. 진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미처 해소하지 못하고 넘어온 근대 단계에서 생겨나는 문제들이 다시 복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포스트모던 논의 속에서 희망과 함께 뒤로 미뤄 두었던 모든 과거의 부정적인 것들이 이명박 정부와 함께, “이게 아직 끝난 문제가 아니었어”라고 하는 듯이. 오래된 흑백 TV의 내용이 LCD TV와 LED TV가 HD 경쟁을 하고 있는 시대에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단지 세대의 문제일까? 정부는 국민을 감시하고 또 처벌하겠다는, 그것도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하겠다는 이 시대는 소통 부재, 권위주의 정부가 아니라, 우리의 정신세계 속에서의 전근대의 요소로 돌아가는 시대가 아닌가?

‘내 안의 파시즘’이라는 선정적 용어가 한동안 유행했다면, 지금은 ‘내 안의 전근대’라는 악몽을 불현듯 상기시키고, 이게 현실의 일이라고 깜빡깜빡 까먹고 있던 것들을 다시 환기시키는 시대가 된 듯하다. 물론 좋은 점은 있는 듯하다. 다시 어려워서 읽기 어려웠던 철학책들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고, 골방에 갇혀있는 예술가들도 창작욕에 다시 불타기 시작한 것 같다. 실용이 ‘전근대’로 바뀌는데 딱 1년 반이 걸렸다.

우리는 지금 표정 없는 가부장이 묵묵히 가정 폭력을 휘두르는 시기를 살고 있는 게 아닌가? 감시는 이메일까지 향하고 있고, 처벌은 전방위적이다. 공포를 내재화하고, 입조심 말조심 그리고 이메일 조심, 이 기막힌 시대착오적 전근대의 요소 앞에 우리에게 근대는 무엇인가, 그리고 탈근대는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게 선진화인가? 자본과 탈자본이라는 질문 옆에, 근대와 탈근대라는 질문을 다시 한 번 배치해야 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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