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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세상읽기]

▲ 우석훈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88만원 세대 저자)
2009년 7월, 한국에서 정책 우선 순위가 가장 높은 정책이라면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바로 미디어법이다. 경제위기를 헤쳐나가는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미디어와 관련된 몇 가지 변화가 우선순위가 가장 높다. 청와대에서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이 법이고, 지난 몇 달 동안 수면 아래로만 맴돌고 있는 개각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가 미디어법 통과 이후에나 개각을 할 것이라는 게 세간의 시선인가보다.

총리가 바뀌면 어떤 유형으로든 이번에는 소규모라도 정개개편이 일어나게 될 것 같은데, 한 국가의 정치 지평의 변화보다 더 우선순위가 높은 것이 지금의 미디어법이라는 사실 자체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물론 TV가 현대인의 일상생활에서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 미디어법이 모든 것을 다 뛰어넘은 정책 우선순위 제 1번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정상적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급하게 논의해야 할 일들, 장기적으로 논의해야 할 일들이 지금 밀리고 밀린 것들이 적지 않을 텐데, 어쨌든 대한민국 정책과 정치는 잠깐 미디어법을 위해서 정지되어 있는 듯하다.

실제로 6월 국회가 제대로 열리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결국 미디어법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걸 도저히 힘으로는 막아낼 수 없는 야당들이 국회의 개원논의에 쉽게 참여할 수가 없고, 그래서 결국 국회마저도 공전이 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셈이다. 지난 몇 년 동안 국회에서 단일 이슈로 가장 큰 사건이라고 하면 한미 FTA의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사안도 시끄럽기는 했지만 국회 자체를 열고 닫을 정도로 그렇게 파장이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디어법은 한미FTA의 영향력을 적어도 정책 내에서 그리고 정치일정 내에서는 가뿐히 뛰어넘는다. 미디어가 중요하다해도, 한미 FTA보다 더 중요하겠는가? 그러나 현실은 이렇게 되어있다.

그러나 그 파장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현재의 형국으로 보면, 아마도 의장 직권상정을 할 것 같고, 또 그 과정에서 힘 싸움이 한 번 벌어지겠지만, 힘으로야 한나라당을 당해낼 재간은 도저히 없어 보인다. 그러면 결국 또 ‘날치기’가 벌어지고, 아마도 간신히 열린 6월 국회는 그날로 문을 닫게 될 것이고, 다음 국회가 언제나 열릴지, 그리고 또 열리기나 할지, 여기에 대해서 보장이 없다. 금산분리법과 같이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서도 이렇게까지 국회는 물론이고, 개각까지 미루어가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를 한 적이 과연 대한민국 역사에 있었는지, 아무리 기억을 뒤집어 봐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

▲ 7월 13일 동아일보 6면
이 정도가 되면, 이걸 일상적이거나 정상적인 정책의 우선순위로는 분석하기가 어렵다. 거의 이 정도면 정책이라고 하기 보다는 일종의 국가 권력 그 자체에 대한 행위들, 예를 들면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이라든가 혹은 친위 쿠데타의 사후 승인 문제, 이 정도에 해당하는 사안들과 우선순위를 놓고 비교해야 할 정도가 아닌가 싶다. 사실 청와대도 그렇고, 여당도 그렇고, 야당도 그렇고 미디어법을 이런 쿠데타 정도로 우선순위를 놓고 대처하는 것 같다. 한 쪽은 미디어법이 통과되기 전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듯이 덤벼들고 있고, 막는 쪽에서는 이 법이 통과되면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형국으로 막고 있다.

물론 본질이 그렇기는 하다. 고용과 산업이라는 얘기를 갖다 붙이기는 하지만, 미디어법은 영구집권과 관련된 논의이고, 그래서 이걸 막는 쪽도 영구집권을 막는다는 각오로 달려들고 있는 것 같다. 경제적 효과니 산업합리화니, 그야말로 아무 정책적 분석이 없으면 영 서류가 심심해보일 것 같아서 갖다 붙인 말이지, 실제로 미디어법의 본질은 영구집권의 기반을 닦느냐, 아니면 이걸 저지하느냐, 그런 거 아닌가? 그렇게 보지 않으면 지금의 사태를 도저히 객관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 사안의 본질은 “국민은 바보다”라는 제1명제 위에 서 있다. TV를 통한 정보 조작이 가능하고, 여론 조작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명제가 미디어법의 제1명제가 아닌가 싶다. 제2명제는 더 슬프다. “PD는 월급쟁이다”라는 것이 미디어법이 작동하는 게 아닐까? 소유권만 확보하면 방송 방향과 내용은 얼마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그야말로 언론 독립의 대명제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전제 위에서 지금의 논의가 움직이는 셈이다.

이건 우리가 아직 선진국이 아니라는, 그래서 대중조작이 가능하다는 현재 여권의 현실인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셈이다. 방송이 어떻든 혹은 소유구조가 어떻든, 시대이성을 보편적으로 만들어나가는 튼튼한 공적 논의가 없는 한국, 그 상황을 역설적으로 너무 잘 보여주는 사건이 미디어법 사건인 것 같다.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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