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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지원준 독립PD

나는 아토피성 체질 소유자다. 요즘엔 워낙 아토피란 증상이 흔해져서 히포크라테스 시절부터 알려진 병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사실 아토피란 말이 한국에 알려진 것은 고작 80년대 초반이다. 80년대 이전에 아토피란 말이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희귀한 경우였기 때문이고, 발병 이유도 그 옛날의 원조(?) 아토피는 100% 유전병이었다. 유전적 아토피의 무서운 점은 거의 100% 발현이고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식물과 공기에도 반응한다는 것이다. 그 당시 나에게 가장 불가사의했던 것은 ‘어떻게 이따위 유전자가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았을까?’였다.

진화론에 의하면, 환경에 맞지 않는 유전자는 번식의 과정을 거치면서 사라져야 한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되면 넘치는 꽃가루에 반응해 재채기와 코피, 눈곱에 시달리며 나물을 캐야 하고, 가을이 되면 건조한 공기에 반응해 허물을 벗어가며 사냥을 해야 한다면, 그 개체의 영양 상태가 좋을 리가 없다. 게다가 항상 시뻘건 얼굴을 하고 어딘가를 긁고 있는 개체를 이성이 좋아할 리가 만무하다. 이런 불량 유전자가 어떻게 살아 남아서 나에게까지 오게 되었을까?

결코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의문은, 군대 생활을 하며 장마를 맞았을 때 간단히 풀렸다. 나는 경비 소대에 속해 있었고, 키가 작은 덕에 야간에만 근무를 서고 있었는데, 장마가 닥치자 갑자기 사물이 두 개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 환청까지 더해져서, 허공에다 대고 탄창을 내밀고는 왜 안 받아가느냐고 따지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백방으로 원인을 찾던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군부대에서는 수돗물을 먹지 않고 지하수를 먹었다.)을 끓여 먹어 보았고, 단 하루 만에 일주일이 넘도록 나를 괴롭히던 환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회복이 되자, 몇몇 고참들이 조용히 얘기를 꺼냈다.

그들의 얘기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내가 겨울에 자대배치를 받던 그 해 봄까지, 화물을 알 수 없는 덤프 트럭들이 일주일에 20대 수준으로 부대 뒷산에 화물을 버리고 갔고, 위병소에서는 트럭 댓수와 대금을 맞추기 위해 트럭 댓수를 보고했다는 것이다. 지난 장마철에 흘러내리고 남은 것이 겨우내 얼어 있다가 이번 장마에 흘러 내리고 있는 것 같고, 자신들의 짐작으로는 아마도 산업 폐기물이 아니었을까 싶다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모종의 화학 물질이고 휘발성이 좋아서 끓이면 날아가 버리는 무언가였던 모양이다. 어쨌건 2년 동안 지하수에 스며 들었던 그 물질에 반응한 최초의 사람이 나였고, 덕분에 우리 소대는 물을 따로 끓여 먹게 되었다. 이등병들은 좀 피곤해 졌겠지만, 알 수 없는 화학물질을 몸 안에 축적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어린 시절의 진화론적 의문이 한 번에 풀렸다. 아토피 체질이 공동체의 생존에 도움을 주는구나. 구석기 시대 때에는 독극물과 먹지 말아야 할 동식물을 감별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고, 이런 역할에 호감을 갖는 독특한 취향의 이성도 있었겠구나. 그래서 아리따운(혹은 건장한) 보조와 함께 유전자를 보존할 수 있었겠구나.

▲ 지원준 독립PD
문명이 발달하면서, 공동체가 피해야 하는 독에는 여러 가지가 생겼다. 그리고 구석기 시대의 감별사 역할을 하는 직업군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언론인이다. 감별사가 그랬던 것처럼 언론인도 예민해야 한다. 그리고 공동체의 독에 대해 스스로 괴로워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점점 독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결국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게 된다. 괴로워 하지 않고, 알려 주지 않는 감별사는 공동체에 더 이상 필요가 없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괴로워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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