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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드릭스의 책읽기] (27)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2009)

▲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엄기호, 낮은산, 2009)
엄기호의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를 읽는다. 신자유주의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레톨릭으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이미 모든 지식인들의 입에 붙어있는 듯하다. 진보진영의 정치인들도 ‘신자유주의’를 입에 달고 산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구체화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국내의 논의들은 별로 없었다. 대체로 ‘신자유주의’를 이야기하는 저작을 번역하거나, 저널리스틱한 논의에서 멈추곤 하였다.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진 ‘신자유주의’는 어떤 것인가? 엄기호의 저작은 구체적 사례들과 이론들의 적절한 배치를 통해서 신자유주의를 우리 눈에 보여준다. 겪고 생각한 신자유주의의 실체가 우리의 눈에 들어온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팽창이 위기에 도달했을 때(케인즈주의, 브레튼우드 체제의 위기 국면)의 ‘탈출구’로 제시되었다. 물론 모두의 합의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 아니다. 미국과 영국의 특정한 이익들이 매개되어 시작된 것이다. 싱크탱크의 입장들은 미국과 영국의 집권과 함께 정책이 되었고,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헤게모니에 의해서 전지구적으로 각 국가에 이식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가 펼쳐진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빨간 저금통에 동전을 모아 통장을 만들던 아이들의 고사리 손이 떠오르는 국민 경제 시스템은 시장에 의해서 재편되었다. 산업자본주의는 금융자본의 헤게모니에 의해서 해체되었고 국가의 역할은 비즈니스 프렌들리로 전환되었으며 시장의 가치는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국가의 자국 산업을 지키고 사회적 안전망을 방어하기 위한 장치들은 ‘규제’라는 이름으로 점차 해체되었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의 유연화는 물론 노동자들을 한 명 한 명의 ‘자본가’로 만들어버렸다. 화물연대 노동자들을 보라. 그들은 한 명 한 명의 자영업자로 호명되고 그들의 파업에 국가가 ‘업무개시명령’으로 강제노동을 시킨다. 다른 한 편 자기계발서는 각자의 자기 관리를 신격화했다. ‘부자 아빠’가 되든지 ‘가난한 아빠’가 되어 배제되든지. “20대에 재테크”에 미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모두는 그 경쟁에서 각자 살아남을 것이라는 이데올로기에 크게 저항하지 않지만, 이제는 기존의 보편적이었던 것들이 ‘예외’가 된다. 이제는 실직이 보편이고 ‘취직’이 예외적 상황이다. 모두는 돈을 굴려 더 많은 돈을 벌게 하는 자본의 논리의 노예가 되었다. 내가 넣은 보험은 펀드투자의 종자돈으로 투신사가 운용하고 있고, 연금도 국가가 주가를 방어하는 데 쓰이고 있다. 모든 것은 돈놀이로 밀려들어간다.

국가도 국민을 이제 ‘주권자’로 생각하지 않고 ‘고객’으로 생각한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소비할 수 없는 ‘소비자’에 끼지 못하면 곧바로 ‘잡상인’이 되거나 ‘거지’로 전락한다. 문제는 이 무너져 내려 더 회복되지 않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들이 계속 반복되고 일상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더 이상 ‘예외’가 아니다.

모두는 불안하다. 모두는 공포에 노출되어있다. IMF 사태로 사업이 무너지고 가족이 해체되었으며 반지하방에서 살게 된 민철의 이야기, 무한도전에 놓여있는 중고등학생 조카들의 이야기, 편입에 실패하면 사랑이 해체되고, 해체된 사랑을 복구하고자 서울에 상경하여 비정규직 노동과 파견 노동에 노출되는 지방대생 형석의 이야기, 못 생겨서 트랜스젠더로 인정도 못 받고 자신의 이야기를 방송에서 팔까 고민하는 트랜스젠더 은영의 이야기, 일제고사에서 성적이 떨어져 자살한 여고생 때문에 땅값이 떨어질까 봐 흙으로 묻어버리는 어느 아파트 단지의 이야기. 이건 모두 예외인가.

낙오하면 짐승이 된다. 성노동을 하거나 그것도 안 되면 감정노동을 하거나 어쨌거나 돈이 되는 걸 팔아야 된다. 그것도 안 되면 장기라도 팔아야 한다. 제약회사의 실험 쥐 대신이 되거나. 미국에서는 고등학생이 홈리스들을 패죽이고선 “게으른 것들 재미삼아서 좀 패줬다”라고 말한다. 덩달아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공격은 편견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고 미끄러진 사람들은 모두 그 표적이 된다. 이주민에 대해서 우리는 “더럽다”고 외치고 “게으르”다고 말하며 짐승처럼 다루고 있지 않나.

그리고 사회적 공범에게 “외국인 노동자 꺼져라”라고 외쳐보지 않았나. 민족주의는 상승효과를 낸다. 황우석 사태를 보라. 대한민국의 국익이라는 모호한 이익은 국민 일반 개개의 이익으로 둔갑하고 거기에 반론을 제기하는 모든 사람은 ‘민족의 적’이 되었다. 최소한의 자기이익이라는 자본주의적 개인의 맥락도 없어져버린다. 신자유주의는 그러한 개인의 맥락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로지 인정하는 것은 소비할 수 있고, 자본을 증식할 수 있는 ‘자본가’ 뿐이다.

▲ 헨드릭스/ 블로거
신자유주의적인 정책, 민족주의적 감성을 활용하는 신자유주의적 국가의 통치술의 본질과 효과를 엄기호는 끔찍한 현실로 풀어낸다. 우석훈, 박권일의 <88만원 세대>가 ‘공포 경제학’이라 불렸는데, 진짜 ‘공포’는 엄기호의 책을 통해 우리에게 시현된다. 현실이 아니길 빌지만, 더 현실적이라 무서운 현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에 대한 포착이 이론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저자의 국제연대활동의 경험과 사회적 소수자들과 연대하는 과정에서 만들어 진 것이기에 그의 이론을 무시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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