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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우의 음악한담]

▲ 최민우 대중음악웹집 'weiv' 편집장
지난 해 국내 음반 결산을 하면서 느꼈던 것 중 하나는 ‘음반’으로 제작된 음악 작품들 중에서 ‘베스트’를 고른다는 것이 제법 힘들었다는 점이었다. ‘음반’의 형태에서 열 장 모두를 고르기가 어려워서 음반보다 짧은 형태의 레코드인 EP(한국에서는 ‘미니 앨범’이라고 통용되는) 역시도 고려해야 했다. 물론 이는 이 글의 필자가 음악을 ‘게으르게’ 들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년이라고 해서 딱히 재작년보다 음악을 덜 들었던 것도 아닌 것 같고, 그 때는 ‘음반’을 고르느라 이렇게까지 고민을 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물어보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반응도 꽤 나왔다. 따라서 이를 한국의 음악 산업에서 음반이라는 형식이 남극의 빙하만큼이나 눈에 띄게 녹고 있다고 해석하는 건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는 음반이 ‘감상용’이라기보다는 ‘소장용’이 되었다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즉 ‘물리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예술적 형식’의 문제에 더 가깝다. 음반 한 장을 채운다는 것은 많건 적건 모종의 ‘형식적이고 예술적인 노력’을 필요로 한다. 물론 음반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어떤 ‘작가적 정신’ 같은 게 필요하지는 않다. 많은 ‘히트’ 음반들이 히트 예상곡(‘타이틀곡’) 한두 곡과 버려도 좋은 곡 아홉 곡, 그리고 건전가요 한 곡 정도로 꾸며지곤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반이라는 형식 자체에 대한 희미한 존중은 어떤 경우라도 남아 있었다. 어떻게든 레코드 앞면과 뒷면을 채우려는 노력은 했다는 이야기다. 이제 그 전통은 사라지고 있다. 많은 뮤지션들이 경제적·시간적·혹은 음악적인 이유로 인해 음반이라는 형태로 결과물을 내놓는 것을 포기하고 있다.

이런 변화를 ‘음악이 상업화되었다’거나 ‘작가정신이 실종되었다’는 식으로 단순히 진단하는 것은 안이한 짓이다. 여러 가지 변수들을 신중하게 고려하고, 그로 인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음을 잘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을 여기서 서술하기에는 지면도 능력도 벅차기 때문에 여기서는 음악평론이 겪게 되는 문제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하는 걸로 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음악평론이 문제를 겪느냐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일반적인 음악평론이라는 것이 ‘음반’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음악에서 본격적인 음악평론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등장한 것도 음반이라는 형태가 확립되면서부터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대중음악평론은 음반이라는 형식과 거의 같은 시공간을 살아왔다고 해도 어폐가 아닐 것이다. 대중음악을 ‘예술’로 고려하는 시각은 음반이라는 형태의 가장 복잡하고 정교한 형식 중 하나일 ‘컨셉트 음반’이 등장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음반은 단지 ‘히트곡 모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종의 ‘예술적 의지’가 단일하게 녹아든 ‘작품’이 되었다. 고전 음악의 ‘작품’ 개념과 유사한 것을 대중음악에도 적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제 이것이 본격적으로 붕괴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전통적 음악평론 역시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도 무척 커다란 변화를. 이는 ‘싱글’이나 ‘미니앨범’을 음반을 대하듯이 평론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정보’로 무장한 저널리즘적 서술을 ‘평론’으로 위장하는 것도 아니다. 평론이란 결국엔 관점의 문제고, 관점을 제시한다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을 꺼내 보이는 행위이기도 할 것이다. 이 관점을 얼마나 적절하고 예리하게 제시하는가가 어쩌면 음반 없는 시대의 음악평론이 다시금 되새겨야 할 점인지도 모른다. 음반이라는 형식, 평론이 안이하게 굴 수 있는 안식처였던 그 형식이 사라진 이 시점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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