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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우의 음악한담]

▲ 최민우 대중음악웹진 'weiv' 편집장
한국에서 대중음악평론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토론이 이루어진 적이 사실상 없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째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평론’이라 부를 수 있는 스타일의 사고방식과 글쓰기 방식이 출현한 것이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고, 다음으로는 그런 사고방식과 글쓰기 방식이 특정한 형태로 자리 잡기 전에 한국의 음악 산업 전반에 걸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종이)매체와 (플라스틱)음반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구세계적’ 평론 역시 순식간에 붕괴했지만, ‘신세계’라 할 만한 것이 찾아오지는 않았다.

더불어 외환위기 이후 근본적으로 변한 세계관(누군가는 그걸 ‘마음의 레짐’이라고도 한다)도 고려해야 한다. ‘먹고사니즘’이니 ‘자기계발의 시대’니 ‘신자유주의’ 등의 단어들이 상징하는 세계에서, 팔리느냐 마느냐, 팔린다면 얼마나 많이 팔리느냐가 지고의 가치가 된 상황에서, 작품이 등장하는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파악하고 개별 생산물들의 내재적 가치에 집중하는 전통적인 스타일의 평론은 평론에 종사하는 집단 바깥에서 보기에는 마치 허수아비를 때리는 작업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이는 평론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경제적 상황이 악화되면서 존중을 덜 받게 된 것이 아니라(평론가는 늘 가난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평론이라는 행위 자체를 존중하고 말고의 문제에 더 가깝다. ‘비판적으로 경멸’하는 것과 그냥 ‘경멸’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중음악은 산업의 변화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달리 말하면 쏠림 현상이 심한) 분야 중 하나다. 그러나 많은 ‘평론가’들은 ‘불변’의 가치를 알게 모르게 전제한다. 그 사이에서 생산적인 긴장이 일어날 때 ‘담론’이라는 것도 생겨나고 ‘태도’라는 것도 자리 잡는다.

▲ 2009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 기자회견. ⓒ연합뉴스
록을 ‘예술’로 보았던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록 이데올로기 역시 대중 사회에서 생겨난 록이라는 (급변하는) 음악 형식에 불변의 가치를 부여하고자 하면서 태어난 게 아니었던가? 하지만 가치 자체의 가치가 의심스러울 경우 그에 대처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더군다나 그게 내재적인 비판에 의해 촉발된 것이 아니라 외부적으로 강제된 것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간추리자면 ‘팝 칼럼니스트’에서 ‘대중음악평론가’라는 명칭의 변화가 일어나던 시점, 그러니까 1990년대 초, 중반의 시기에, 한국의 대중음악평론은 이른바 ‘진정성’이라는 개념에 집중하면서 스스로의 위상을 정립하고자 했고, 이는 외부적으로는 산업과의 (건전한) 긴장관계를 확립하고 내부적으로는 영미권 록 이데올로기의 ‘실천’적이고 ‘정치’적인 수용을 넘어서야 한다는 과제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 과제가 적절하게 해결되었는지는, 돌이켜 볼 때 다소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여전히 대중음악평론이라는 것이 ‘취미’와 ‘전문직’ 사이에서, 즉 ‘딜레탕트’와 ‘생계’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것이 그 한 증거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두 대중음악웹진에서 한국의 음악평론에 대해 나름의 시각을 개진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보다]의 서정민갑이 ‘한국 대중음악평론의 내일을 묻는다’라는 글을 발표했고, 이에 대하여 [weiv]의 차우진은 ‘웹진 [보다]의 〈한국 대중음악평론의 내일을 묻는다〉에 대한 반론’을 게재했다. 여기서 이 두 글에 대해 세세하게 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읽어보면 된다. 길지도 않다). 다만 그것들을 한국 대중음악평론이 자기가 지금 서 있는 위치가 어디인지를 묻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는 데 의의를 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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