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램/제/작/기 KBS <인간극장> ‘친구와 하모니카 그후’(방송 4월23일~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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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선 ‘가락시장역’서 하염없이 하모니카를 불던 ‘하늘이 형’

|contsmark0|하늘이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뜬금 없이 나무를 심으러 간다고 했다. 어디로 가느냐 물으니 무조건 산으로 간다고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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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3|엉뚱하다 싶었지만 나는 따라가 맨발로 흙이라도 밟고 싶었다. 하늘이 형은 22년째 노숙자로 떠돌고 있다. 손과 발이 굽고 언어장애까지 짊어진 채 휘청이며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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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6|형의 취미는 석촌 호숫가에서 자라, 오리, 잉어를 그리는 것, 해독이 불가능한 글쓰기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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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9|98년 겨울 아침.
|contsmark10|우연히 8호선 가락시장 역 지하도에서 형을 만났다. 분주한 출근길 한 모퉁이 차디찬 대리석 벽에 기대어 하염없이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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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13|당시 나는 고은 선생이 ‘만인보’를 쓰듯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을 찍어 ‘어느 낭떠러지에서 온 엽서’란 시적인 다큐 연작을 만드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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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16|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하모니카 연주자를 찍다가 불쑥 다가가 하루에 얼마나 버느냐고 물었다. 형을 구걸자로 알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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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19|뜻밖에도 “돈은 한 번도 안 받아 봤다”고 했다. 그럼 왜 이렇게 부느냐 물으니 “하모니카를 불면 행복하기 때문에”라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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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22|그 자리에서 우린 친구가 됐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형은 가락시장 근처 천주교회에서 주는 점심을 얻어먹기 위해 새벽부터 그 빈 시간을 이렇게 하모니카를 불며 보내고 있던 것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 참 서글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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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25|그 서러운 풍경을 따라 다니다가 스무살 귀여운 앵벌이 두환이도 만났고 삼십여 년 밑바닥을 구른 전리품으로 달관의 경지에 오른 알콜 중독자 석현이 형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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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28|우리는 의기투합해 서울의 변두리며 음습한 곳을 들개처럼 쏘다녔다. 그 기록 중 일부를 떼어 지난 2월 ‘친구와 하모니카’란 제목으로 <인간극장>에 방영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남루한 모습이 방송되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친구의 일이니 즐거움으로 지지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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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31|방송을 본 많은 이들이 노숙자들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졌고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것은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 친구들이 준 작은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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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34|어쩌면 도움이 필요한 존재들은 그들이 아닌 우리였는지도 모른다. 방송도중에 뜻밖의 사건의 터졌다. 하늘이 형의 가족이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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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37|전북 장수까지 내려가 가족임을 확인하고 그들과 함께 서울로 오면서 나는 스스로 어쩌지 못할 상심에 빠졌다. 하늘이 형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큰 허전함으로 스며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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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40|가족들을 잠실역에 세워놓고 먼저 하늘이 형에게 다가가 그 사실을 알렸다. 몰론 그 와중에도 촬영을 하고 있었는데 하늘이 형을 영영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서인지 본분을 잊고 펑펑 울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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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43|우여곡절 끝에 하늘이 형은 가족과 함께 고향에 갔고 석현이 형은 자신의 고향에 데려달라고 울며 하소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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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46|무호적자로 평생신분증이 없이 산 석현형 스스로는 군사지대인 백령도에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열세 살에 고향을 떠나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 형은 그 무덤에 찬 소주 한잔 올리는 것이 소원이었다. 백령도에서 석현형은 한없이 울고 노래하고 어머니를 외쳐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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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49|그리고 돌아와서는 자취를 감추었다. 고향에 갔던 하늘이 형은 결국 20여년 노숙의 체질을 못 벗고 다시 잠실로 돌아와 거리에서 생활하고 두환이는 앵벌이를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의 가게 일을 돕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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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52|그리고 얼마 후 석현형이 연안 부두가에서 알콜 중독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그 주머니 속에 내 연락처가 유일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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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55|그것이 지난 4월 23일부터 연속5부작으로 방영된 <친구와 하모니카 그후>였다. 석현형의 사인란에 내 이름이라도 써넣고 싶은 자책감으로 수일을 헤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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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58|그러던 어느날 지쳐 쓰러진 채 잠이 들었는데 형이 웃는 모습으로 두 번이나 꿈에 나타났다. 깨끗한 복장으로 잘 있으니 너무 힘들어하지 말고 기운차리라는 의미로 해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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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61|나는 죽을 때까지 그 죽음에 대한 알리바이를 갖지 못할 것이다. 석현형 만이 아니라 세상의 크고 작은 죽음과 상처들로부터. 그것이 다큐멘터리를 하는 내 숙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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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64|그렇게 4월의 가문 잿빛 하늘아래를 지나왔다. 하늘이 형이 또 전화를 해왔다. 요즘은 어디서 자느냐고 물었더니 지하도에서 못 자게 해서 석촌 호수가의 빈 정자에서 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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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67|새로운 촬영으로 당분간 형을 만날 수가 없다. 그래도 봄이 되어 나온 자라, 오리, 잉어들이 친구해 줄테니 맘이 조금 놓인다. 지금 난 실패와 절망의 골짜기에서 나이 육십에 다시 재기를 꿈꾸는 <영구와 땡칠이>의 감독 남기남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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