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는 어떻게 ‘세계인의 선물’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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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영국=장정훈 통신원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BBC는 영국이 국제사회에 준 20세기 최고의 선물이다.” BBC는 어떻게 국제 사회를 아우르는 최고의 선물이 되었을까?

BBC트러스트(BBC Trust) 라는 게 있다. BBC 사장을 임명하고, BBC의 전략과 정책 예산을 승인하며 감독 및 평가까지 담당하는 강력한 기구다. 이전에는 BBC이사회가 이 기능을 했는데 이사회 스스로 내부 조직화 되면서 BBC를 바른길(?)로 이끌지 못한다는 논란에 따라 2007년에 새롭게 발족한 기구다. BBC와 사이가 좋았던 정권은 없었지만 좀 더 많이 관계가 불편했던 토니 블레어 집권 시절이다.

BBC트러스트 위원 12명은 실질적으로 수상이 임명한다. BBC트러스트의 전신인 BBC이사회도 수상이 임명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사람들이 BBC 이사회로 들어가기만 하면 정권과 각을 세우며 BBC편을 들었다. 누구 덕분에 이사가 되었는지는 아랑곳없이 말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게빈 데이비스. 그는 2001년 토니 블레어에 의해 BBC의 이사로 임명되자마자 취임사에서 “나를 임명한 정권의 꼭두각시 노릇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대로 실천하다가 2004년 끝내 사임했다.

토니 블레어는 BBC이사회와 BBC를 좀 멀리 떨어뜨려 놓고 싶었을 거다. 그래서 BBC트러스트를 만들었지만 성과는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BBC의 야성은 여전하고, 트러스트는 그런 언론의 야성을 무디게 만드는 게 본연의 임무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BBC트러스트엔 태생적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 BBC는 지난 5일 홈페이지와 블로그를 통해 BBC트러스트의 BBC 전략 검토 중간보고서를 공개했다.
그런 BBC트러스트가 BBC에게 스타 출연자들의 출연료 공개를 강권하고 나섰다. 좀 더 투명해 질 것을 권고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 BBC는 매우 투명한 조직이다. BBC에서 일하는 상위 100명의 급여는 3개월에 한 번씩 공개된다. 보너스는 물론 개개인의 업무 진행비 사용내역까지 세세하게 공개돼서 간혹 개인적인 일에 사용한 푼돈을 공금처리 한 것이 밝혀져 구설수에 오르기도 할 정도다.

매년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발행되는 보고서는 BBC에 대한 거의 모든 내용을 담고 있다. 수입과 지출내역을 기가 질릴 정도로 세세하게 볼 수 있고, 장르별 프로그램에 대한 분석과 평가에서 부터 계획, 문제점과 개선책 등이 모두 실려 있다. BBC는 웹사이트를 통해서도 BBC 편집 가이드라인과 프로그램 제작비 지급에 관한 규정과 절차, 독립제작사와의 계약관계 등 일반인이나 방송계 사람들이 궁금해 할만한 거의 모든 내용을 속속들이 공개하고 있다.

또 BBC는 늘 BBC를 취재하고 보도한다. BBC에 문제가 있다면 어떤 문제가 왜 있는지 BBC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렇게 BBC 스스로가 많은걸 공개하고 있지만 BBC는 여전히 BBC트러스트나 오프콤(Ofcom)같은 기구들로부터 프로그램 편집권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감시를 받는다. 그런데 그런 감시가 나쁜 영향을 주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BBC를 더욱 투명하게 만들고, 그래서 BBC 구성원들을 한층 더 떳떳하고, 당당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조직을 겸손하게 만들고, 외부의 신뢰를 높이는 효과는 ‘투명성의 힘’이다. BBC트러스트나 오프콤이 BBC만큼 투명하게 모든 걸 공개하는 것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다.

BBC에선 지난 수십년 간 이렇다 할 파업이 없었다. 정리해고의 바람이 불고, 임금을 동결해도 노사는 늘 대화와 타협으로 고비를 넘겼다. BBC를 견제하는 기관과 사람들은 매년 수신료를 올려주며 BBC의 가치를 앞장서 설파했다. 필자는 그 비결을 ‘투명성’에서 찾는다. 투명함은 신뢰를 낳고, 신뢰는 대화로 이어져 상생을 모색하게 하기 때문이다.

▲ 영국=장정훈 통신원 / KBNe-UK 대표
그래서 누가 이사를 임명하고 누가 사장을 뽑는가 하는 시스템적인 문제보다 더 중요한건, 개인과 조직이 얼마나 투명성을 중요하게, 보편적 상식으로 생각하느냐에 있다.

파업에 징계로 대처하고, 전파를 사장 자신의 정신을 담아내는 밥그릇쯤으로 나아가 정권에 입 맞추는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언론관을 가진 조직은 절대로 투명할 수 없다. 스스로 투명하지 않은 조직이 우리사회의 투명성을 강조할 순 없다. 언론자유를 논할 수도 없고, 공정할 수도 없다. 수신료 인상에 대한 저항을 잠재울 수 없고, 이어지는 파업을 끊을 수도 없고, 스스로를 보도할 수도, 남이 보도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는 것이다. BBC가 ‘세계인의 선물’이 된 중요한 비결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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