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화장실에서 설거지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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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화장실에서 설거지를 하다
[PD의 눈] 공태희 OBS 예능제작팀 PD
  • 공태희 OBS 예능제작팀 PD
  • 승인 2010.10.06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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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마다 어김없이 ‘어쩔 수 없는 단순노동’의 시간이 다가온다. 이를테면 이런 셈이다. 한 겨울 야외에서 중계차로 녹화해야 했는데, 녹화 전날 몇 십 년만의 대 폭설. 그리고 중계차가 들어 설 곳은 시내의 노상 공영주차장. 녹화를 취소했다가는 방송 전체 스케줄 자체가 붕괴될 상황. 하루 전 녹화장소에 도착해서 눈이 뭉쳐 얼기 전 삽으로 치워내고, 타고 간 승용차를 중계차 위치에 미리 주차했다. 적어도 쌓인 눈 때문에 중계차를 주차하지 못하는 일은 없게 해야 했다.

그리고 이번 새 프로그램이 강요하는 ‘어쩔 수 없는 단순노동’은 엄청난 양의 설거지다. 데일리 요리 프로그램은 녹화 전 요리 세팅에 들어가는 밑 준비와 녹화 후 정리에 고도의 근면 성실이 요구된다. 그 중 백미는 역시 녹화 전후로 발생하는 방대한 양의 설거지다.      화장실에서의 설거지는 모양 빠지는 건 둘째 치고라도 꽤나 비효율적이다. 평소에도 집에서 주방 싱크대의 높이는 불만이었다.

여성의 표준 신장에 맞춘 싱크대에서 설거지는 꽤나 허리를 아프게 한다. 그런데 화장실 세면대는 그것보다 조금 더 낮다. 수도꼭지의 방향을 바꿀 수도 길이를 조절할 수도 없다. 게다가 세면대는 보통 싱크대와 비교가 불가능할 만큼 작다. 이런 악조건을 감수하고 다수의 양수냄비 프라이팬, 그리고 셀 수도 없는 갖가지 크기의 접시와 양념 그릇과 조리 도구를 설거지 하는 일은 분명 비효율적이다. 이미 40줄에 들어선 젊지 않은 나이에 심야 회사 화장실에서의 폭풍 설거지는 약간의 자괴감, 조금 더 큰 서글픔을 가져왔다.
사소하지만 마음이 따뜻해지는 위로가 필요한 시간은 바로 그런 때다. 미담이라고 하기에 너무 작지만 마음이 든든해지는 일상의 위로가 절실한 순간.

PD가 연출 스태프 전원을 이끌고 심야에 화장실에서 방대한 양의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곧 40줄에 들어설 메인 작가는 손수 큐카드를 오리고 잘라 붙이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바로 그 시간 스튜디오에서는 조명팀이 밤샘작업에 돌입했다. 하루 8편의 녹화를 해야 겨우 제작비와 출연진의 스케줄을 맞출 수 있는 형편이다. 이미 나이 지긋한 중년의 간부급 조명감독은 PD의 애끓는 심정을 헤아려 주었다. 최소에도 모자라는 인원으로 근근이 버티는 전 조명팀이 총 출동해 이틀간, 그것도 휴일의 밤샘 조명작업에 돌입했다.      

 역시 최소라고 하기도 어려운 극소수 인원으로 전 프로그램 제작을 담당하는 ENG팀이 프로그램 전담 스태프를 구성했다. 중소규모의 방송사에서 단위 프로그램 촬영 전담팀을 꾸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심을 해 주었고, 그 덕택으로 방송회차마다 각기 다른 복잡 난해한 영상 구성을 매주 바뀔 뻔한 촬영팀과 공유해야 하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공태희 OBS 예능제작팀 PD

그리고 보니 마음이 든든해지는 사소한 미담은 셀 수도 없다. 겨우 바닥 재료나 세울까 싶은 초절전 예산의 한계를 창의력과 근면 성실로 극복해 아름다운 세트를 만들어 준 미술팀. 1일 8회 녹화에 80개 이상 필요한, 개당 단가 10만원을 넘는 고가의 촬영 XD 디스크를 선뜻 새 프로그램에 기부해 준 동료 PD들. 그들을 가슴에 담고 이번 주 설거지는 기꺼운 마음으로 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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