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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기] 임경식 MBC ‘7일간의 기적’ PD

장면 하나. 강릉의 주택가. 촬영팀이 골목을 지날 때, 마침 할머니는 머리숱이 많지 않은 할아버지의 머리를 정성스레 염색하고 계셨다. 50년 동안 함께 살아온 두 분의 세월을 듣고, 가게에서 내오신 음료수를 얻어 마시고, 기적원정대는 3일 동안 고생해서 바꾼 고급 시계를 할머니 손목에 채워 드렸다. 떠나면서 기적원정대로 나선 젊은이들은 그 노부부에게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남겼다. 고작 음료수 4개와 고급 시계를 바꾸면서 뭐가 고맙지?

장면 둘. 경기무형문화재 한상구 선생님, 여주의 가마터에서 만났다. 일평생 자기를 빚고, 구운 명인 중의 명인이다. 작년인가, 우즈베키스탄에서 이름도 알 수 없는 누군가의 각막을 받아 한쪽 눈의 시력을 찾았다고 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선생님은 고가의 도자기를 내주려고 하셔서 황급히 윤도현 씨한테 기증받은 바람막이 점퍼를 드리고 도자기와 물물교환을 했다. 헤어질 때, 선생님은 우리에게 ‘고맙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백만 원을 호가하는 도자기를 내주면서 도대체 무엇이 고맙다는 거지?

▲ MBC ‘7일간의 기적’
처음에는 그랬다. 한국 사람들, 정(情)이 참 많구나. 제작을 하면서 길에서 만난 고마운 마음에 감격하고, 선뜻 베풀어 준 호의에 감사하고, 건네준 차 한 잔에 마음이 따뜻해지고. 이런 것이 정이라는 거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왜 더 좋은 물건, 더 큰 물건을 바꾸어 주면서도 미안해하고, 때론 이것밖에 안 된다며 눈물까지 흘리는 걸까?

지나고 나니 알겠다. 한국 사람들, 정을 줄 곳이 없구나. 표현할 방법을 모르는구나. 그래서 물건의 실제 가치와 상관없이, 주는 사람, 받는 사람 서로서로 고마워하는구나. 알았다. 

오늘도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전화기가 울린다. 집에 세탁기가 있는데 실어가란다. 또 전화가 울린다. 자신도 기초수급대상자인데 형편이 자기가 조금 더 나은 것 같으니 컴퓨터를 기증하고 싶단다. 화장실에 다녀오면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이번에는 쌀 한 가마니다. 프로그램을 제작하는지 아름다운 가게를 운영하는지 헛갈릴 때가 있다.

▲ 임경식 MBC PD
<7일간의 기적> 제작기를 처음 부탁 받았을 때, 손사래 치지 않은 걸 뒤늦게 후회했다. 사회복지사가 아닌 PD로서 할 말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연출도, 섭외도, 일정도 없는 막연한 여행. 그 속에 나는 방관했고, 또 발견했다. 그건 기적의 발견이 아니라 생활의 발견이다. 우리가 나서면 사람들은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알게 된다. 한 때는 내게 소중했던 것이 아주 가까이 있었다는 걸.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프로그램이 아름답다고 생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이런 저런 걱정들이 많다. 이제 곧 겨울이고, 한파로 촬영은 한층 어려워지는 반면, 안방에는 시청자들로 가득 찰 테니 봄에 새롭게 꽃 피려면 겨울을 살아내야 한다. 기적을 이루려면 먼저 남아야 하는 것이다. 최근에 읽은 박노해 씨의 표제시가 떠오른다.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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