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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의 죽음을 보고받고 다른 한 남자는 사뭇 비장한 어조로 그의 죽음을 생방송으로 전했다. 그 남자는 한 인간이 살해당한 사실에 대해서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선과 악이 역전되는 순간이 전파를 타고 있었다. 빈라덴과 오바마의 이야기다. 애초에 오바마에 대해서 기대할 것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내 평소의 예상이 적중하는 순간이었다.

미합중국의 대통령은 철저히 미국(특히 자본과 권력)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대표자일 뿐, 그의 정치적 출신이 민주당이냐 공화당이냐 따지는 것은 도토리 키재기 보다 더 의미 없는 구분이다. 그리고 실상 1980년대 이전까지는 민주당 집권기의 미국이 팽창 정책과 개입 정책을 더 강력하게 추진해왔던 역사적 사실이 있으니 오바마의 집권이 세계 평화에 기여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로까지 망가질 줄은 몰랐다. 인권을 이야기하고 세계의 희망이라는 정치적 레토릭을 밥 먹듯이 해온 그가, 한 인간의 살해 현장을 자기의 패거리들과 지켜보고, 그 살해 현장의 붉은 피가 식기도 전에 그 참혹한  살인의 추억을 자신의 재선 가도에 불을 밝히기 위한 담대한(?) 정치적 자양분으로 이용하는 쇼맨십까지 보여줬다는 사실은 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충격적인 저질성이다.

그 백악관 생방송 이후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새롭게 밝혀지는 사실들은 더욱 경악할 만한 것들이다. 그 살해 현장에 정의는 없었다.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한다는 미국의 명분도 없었다. 그곳이야말로 반인권과 반인륜이 피처럼 흥건했던 테러의 현장이었다. 나는 오사마 빈라덴을 지지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든 인간적으로든 마찬가지이다. 전쟁과 테러는 그 어느 것도 인류의 미래를 담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인간으로서의 권리는 지지한다. 인류 전체를 통틀어서 차별받지 않는 보편적인 인간으로서의 권리, 그것이 인권이다. 그에게서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할 권리는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연쇄살인마도 3심의 재판을 거치며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가지는 것에 대해서 모두 동의하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이번 사건은 오바마의 영광도 아니고 미국의 승리도 아니다. 오히려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이 거의 확실히 지고 있음을 전세계에 선언하는 조종에 가깝다. 명분 없는 전쟁은 인류역사상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음을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더구나 전쟁이 아니라 한 개인에 대한 살인을 정부 전체가 나서서 수행하는 국가를 누가 존경하겠는가. 이젠 미국이 주장하는 인권의 의미가 궁색해졌다.  

▲ 김욱한 포항MBC PD

그런데 그 날, 오바마의 연설 장면과 빈라덴의 살해 현장 화면보다 더 지켜보기 힘들었던 장면은 미국 시민들의 환호였다. 아무리 국가의 공적이었다고 하더라도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그렇게 열광적으로 축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그들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나에게 물어봤다. 누가 죽으면 그렇게 기쁠 수 있을까 하고. 아무리 물어봐도 없었다. 인간의 죽음은 본질적으로 슬픔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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