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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수 순천향대 미디어콘텐츠학과 교수

세계공영TV총회(INPUT) 서울대회가 끝났다. 다양한 국가의 공영방송 제작자들이 모여 미디어환경의 변화에 대해 토론하고 시사회를 가졌다. 제작 PD로 있던 시절 세계대회에 참석하지 못하고, 한국 시사회만 부지런히 참석했던 터라 이번에는 4일 일정 중 2일을 참석했다. 비행기 값 들지 않고 INPUT을 즐길 수 있는 진귀한 기회를 얻은 것이다.

시를 토대로 한 드라마, 상상력 놀라웠다

▲ 영국BBC 드라마 <시와 점심>

가장 먼저 만난 INPUT 프로그램은 지난 9일 밤 KBS 2TV에서 방송했던 <시와 점심>(The Song of Lunch)라는 드라마였다. 옛 연인과 15년 만에 해후하는 남자의 심정을 시적 독백으로 풀어낸 영국 BBC의 작품으로 엠마 톰슨, 앨런 릭맨이 주연을 맡았다. 영국시인 크리스토퍼 라이드의 시를 극화한 것이라는데, 시를 토대로 드라마를 만들어가는 상상력이 놀라웠다. 게다가 훌륭한 두 연기자로 인해 흠뻑 드라마에 몰입할 수 있었다. 동물적인 남성성과 섬세한 아취의 여성성을 문학으로 그리고 드라마로 풀어낸 수작이다. 드라마가 끝난 후 기분 좋은 설렘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어쩜 드라마를 이렇게 만들 수 있을까?”

INPUT 둘째날인 지난 10일 행사장인 여의도 63컨벤션센터에서 본 네덜란드의 <경비원>은 액자 다큐멘터리라 할 만큼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담아냈다. 현실을 담는 다큐멘터리를 현실로 삼는 다큐. ‘모든 미디어의 내용은 또 다른 미디어다’라는 마샬 맥루한의 선언처럼 모든 미디어는 그 안에 미디어를 담고 있다는 진실을 은유한 듯 보였다. 다만 이어서 본 <레스토랑 엘 불리에서의 하루>는 왜 이 작품이 ‘속는 시청자’라는 주제의 세션에 포함됐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프로그램 내용도 반 광고성 프로그램이어서 상영이 끝나고 이에 대한 토론이 활발했다.

오후에는 코미디를 보았다. 벨기에의 <더츠>, 아일랜드의 <브라운 여사>, 네덜란드의 <타워C> 등 이 가운데 돋보인 것은 <브라운 여사>다. 한국에서는 사라진 세트가 있는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이다. 개그 콘서트와 다른 것은 시트콤처럼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어진다는 것. 여장 남자 배우의 힘 있는 연기와 말솜씨로 매 순간순간은 분해되고 해체된다. 그가 존재하는 시공간에는 지루함이 머물 시간이 없을 정도로 그는 유머라는 칼을 휘둘러 지금이라는 공간을 해부한다.

환경 문제 다룬 ‘체르노빌…’ ‘더 파이프’

이어서 TV에서의 환경 문제를 다룬 세션에 참가했다. 아일랜드의 송유관 설치 사업을 두고 주민의 반대 투쟁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더 파이프>와 체르노빌의 현재 생태계가 어떤 지 탐사하는 과학다큐 <체르노빌, 자연의 역사인가?> 두 편을 보았다. 파이프는 개발 논리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한국이든, 아일랜드든, 일본이든 누구나 개발하면 이득이 된다는 논리가 존재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4대강 사업이 파이프에 해당할까? 시사가 끝나고 토론에서도 한국 사회의 데자뷰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체르노빌…> 역시 일본 원전사고 이후의 원전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담론이 넘치는 가운데 시의적절한 다큐멘터리였다. 체르노빌에서 사는 동식물의 변화를 살펴보고 그 황폐한 환경에도 적응해가며 사는 자연과 뒤틀어진 환경을 보여주며, 재앙의 결과로 나타난 획일적인 결론이 아닌, 다양한 분화가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잘 보여주었다. 산다는 것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는 삶이란 너무나 복잡다기하고 미묘한 것이라는 것을 <체르노빌…>은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 프랑스 다큐멘터리 <체르노빌, 자연의 역사인가?>
둘째 날에는 ‘현실 세계를 TV 속 현실로’ 세션으로 시작했다. <클리브랜드 Vs. 월스트리트>는 스위스에 사는 제작자가 미국의 서브 프라임 사태 뉴스를 듣고 미국으로 건너가 만든 재연 다큐멘터리다. 불량 신용자에게 고금리의 대출을 권하고 이를 묶어 파생금융 상품을 만든 월스트리트를 고소한 클리브랜드 주민의 재판과정을 재연했다. 실제 재판처럼 무작위로 배심원을 선발하여 판결을 내리게 했다. 지구상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주민적 관심을 갖고 제작한 프로듀서의 글로벌 마인드도 좋았고, 이를 흡사 현실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잘 연출한 능력도 돋보였다.

이것이 현실인 것처럼 보이면 시청자를 기만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들이 쏟아졌다. 제작자는 프로그램 앞의 고지가 있기 때문에 괜찮다는 것. 다큐멘터리는 뉴스와 달리, 관점과 해석에 대해 관용적이라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 듯. 이어 <동베를린의 사랑>은 동독에서 반체제 인사와 경찰의 자녀의 험난한 사랑을 담은 연속극이었다. 통일 후 북한에 대한 드라마를 보게 될 미래를 보는 듯했다. 제작자는 딱딱한 다큐멘터리는 달랐던 두 체제에 대한 이해를 가져오기 어렵다며, 이런 픽션이 교육적 효과가 높다고 강조했다.

멀티플랫폼을 위한 프로그래밍 세션에서는 인터넷용으로 만든 프로그램을 볼 수 있었다. <무능력한 엄마의 기록>은 프랑스의 파워블로거의 글을 바탕으로 극화한 것이다. 인터넷에 맞게 5분 안팎으로 짧게 구성했고, 누구나 공감할 만한 육아의 과정을 잘 묘사했다. 미국의 <미래의 나라>시리즈는 독립영화 제작자들의 의식 있는 미래만화경을 극화했고, 오로지 웹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뉴미디어 시대에 방송 채널만이 미디어가 아니라 누구나 콘텐츠를 미디어 인프라를 통해 유통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증하는 프로젝트였다.

이날 밤에는 KBS 홀에서 INPUT 축하음악회가 있었다. 밤 10시부터 11시까지 생방송된 음악회는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라 할만 했다. 각국의 대표들은 한국의 전통음악뿐만 아니라 K-POP 가수들의 공연을 이미 익숙한 듯이 충분히 즐겼다. 이보다 한국의 방송문화를 더 잘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에 대한 높은 이해력을 가지고 한국의 문화와 한국의 방송을 받아들이는 계기로도 작용할 것이다.

해외 제작자에게는 관대한 우리 방송 현실

이번 행사를 통해 느낀 점은 두 가지다. 우선 한국의 방송 프로그램의 창의성은 크게 저해되고 있는 상황에서 해외의 다양한 프로그램들은 한국 제작자를 마사지하는 효과를 주었다. 한국의 공영방송 제작자들이 ‘4대강’의 문제점을 다룬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데 큰 반대에 직면했던 데 비해, 이와 딱 들어맞는 아일랜드의 <더 파이프>나 원전의 위험성을 경고한 <체르노빌…>은 지상파에 과감하게 편성됐다. 국내 제작자에게는 인색하고 해외 제작자에게는 관대한 아이러니한 풍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다만 이번 편성이 공영방송의 유연성을 환기하는 계기로 되살필 수 있다면, 이번 INPUT 서울대회는 충분한 역할을 다했다고 본다.

INPUT 시사회가 끝나고 많은 토론이 이뤄졌다. 한국의 학회의 풍경과는 사뭇 다른 점이 들어왔다. 발표하고 지정토론이 끝나면 객석의 1~2명의 질문만을 받고 끝내는 한국의 학회와 달리, INPUT에서는 1시간짜리 프로그램을 보고는 거의 비슷한 시간을 토론하는 것을 보았다. 그중에는 시시콜콜한 문제라고 생각되는 것들도 있었으나, 굉장히 다양한 의견들이 논의에 오르는 것을 보고 놀랐다.  

▲ 홍경수 순천향대 미디어콘텐츠학과 교수
어쩌면 이러한 일상생활에서의 토론의 양과 깊이의 차이가 방송 프로그램의 깊이와 질을 좌우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이 끝나고 질문하라고 하면 질문이 없는 학생들, 학회 발표가 끝나고 질문하라고 해도 질문 없는 객석들, 정부가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국책사업에 질문하지 않는 기자들과 국민들…이러한 일상의 편린들이 모여서 지금의 한국의 미디어 공론장을 만든 것은 아닐까?

INPUT 을 참관하며 든 생각은 ‘현실은 미디어다’라는 명제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에서 미디어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미디어를 바꾸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우리가 현실을 살아내는 방법을 바꾸는 것이라고 2011 INPUT 서울대회는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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